알렉산드로스 3세
- Aléxandros Ⅲ
(영)Alexander Ⅲ. 별칭은 Alexander the Great, Alexander of Macedonia.
BC 356 마케도니아 펠라~BC 323. 6. 13 바빌론.
마케도니아의 왕(BC 336~323 재위).
전투 중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모습을 새긴 대리석 부조(BC 310경), 레바논 시돈에서 출토,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Archaeological Museums 소장 |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마케도니아 군사력을 인도까지 진출시켰으며 지역왕국들로 이루어진 헬레니즘 세계의 토대를 쌓았다. 살아 있을 때부터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사후에는 개략적인 윤곽만 역사적인 사실과 일치할 정도로 거대한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를 '제우스 신'으로 신격화한 첫 주화인 드라크마 은화(BC 297~281), 지름 30㎜,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계승자 리시마코스가 트라케(트라키아)에서 주조했고, 디자인은 그리스 조각가 리시포스의 작품을 복제한 것으로 보인다. British Museum 소장 |
생애
필리포스 2세와 에페이로스 왕 네오프톨레모스의 딸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나 13~16세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받고 그의 영향으로 철학과 의학, 과학적 탐구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은 노예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스승의 편협한 가르침을 뛰어넘었다. BC 340년에 필리포스가 비잔티움을 공격하는 동안 마케도니아 통치를 맡아 트라키아(트라케) 부족인 마이디족을 무찔렀으며 2년 뒤 필리포스가 그리스 동맹국들을 격파한 카이로네아 전투에서는 좌익군을 지휘했고 테베의 신성동맹을 격파할 때 개인적인 용맹성을 보였다. 1년 후 필리포스는 올림피아스와 이혼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의 새 결혼을 축하하는 잔치석상에서 한바탕 분란을 일으킨 뒤 어머니와 함께 에페이로스로 달아났다가 나중에 일리리아로 갔다. 그 직후 아버지와 화해하고 마케도니아로 되돌아갔으나 후계자 지위가 위태로웠다.
그러나 BC 336년에 필리포스가 암살되자 군대의 지지를 받아 반대하는 사람 없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고 나서 즉시 필리포스 살해를 배후조종한 혐의를 씌워 린케스티스의 제후들을 비롯해 경쟁자들과 반대세력을 전부 제거했다. 이어서 그는 남쪽으로 진군해 불안정한 테살리아를 되찾고 코린트에서 열린 그리스 동맹회의에서 필리포스가 이미 계획하고 제안했던 아시아 침공을 수행할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델포이(이곳에서 아폴로 신전의 여사제들이 그에게 '천하무적'이라는 찬사를 바쳤음)를 거쳐 마케도니아로 돌아와 BC 335년 봄에 트라키아로 진군했으며 시프카 통행로를 탈취한 이후 트리발리인을 격파하고 도나우 강을 건너 게타이인을 분산시키는 한편, 서쪽으로 기수를 돌려 마케도니아를 침략한 일리리아인들의 연합군을 무찔렀다. 그동안에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져 테베 민주주의자들의 봉기가 촉발되었으며, 다른 그리스 국가들도 테베를 지지했다. 아테네인들은 데모스테네스의 선동에 영향받아 지원을 결의하는 표결을 했다. 14일 만에 알렉산드로스는 일리리아의 펠리온(지금의 알바니아 코르처 근처)에서 테베까지 386km를 행군했다. 테베인들이 항복하지 않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입성해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신전들과 핀다로스의 집만 남겨두었다. 그 와중에서 6,000명이 살해당하고 남은 생존자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다. 다른 그리스 국가들은 이처럼 잔혹한 조치에 겁을 먹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여유를 찾고 아테네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조치했다. 코린트·칼키스·카드메아(테베 성채)에는 마케도니아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페르시아 원정의 시작
왕위에 오를 때부터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결심하고 있었다 (→ 색인 : 전쟁). 그는 성장하는 동안 늘 그 목표를 염두에 두었으며 더욱이 필리포스가 창건한 군대를 유지하고 자신이 빚진 500탈렌트를 갚기 위해서는 페르시아의 부가 필요했다. 그리스 원정군인 만인대(萬人隊)와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가 페르시아 영토 내에서 성공적인 원정을 벌임으로써 페르시아 제국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대 병력만 충분히 있으면 어떤 페르시아 군대라도 물리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다. BC 334년 봄에 그는 이미 아버지 때부터 충성해온 안티파트로스를 1만 3,000명이 넘는 병력과 함께 자기 대리인으로 유럽에 남겨두고 다르다넬스(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다. 그는 보병 약 3만 명과 기병 5,000여 명(그 가운데 1만 4,000명가량이 마케도니아인이었음), 그리고 그리스 동맹에서 파견한 7,000명가량의 연합군을 직접 지휘했다. 원정군은 측량사·기술자·건축가·과학자·궁정관리·역사가 들을 대동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처음부터 무제한 원정을 벌일 생각이었던 것 같다.
호메로스에게서 영감을 얻은 낭만적인 행동으로 일리움( 트로이)을 방문한 이후 그는 마르마라 해 부근의 그라니코스(지금의 코카바스) 강에서 사트라프 3명이 이끄는 페르시아군과 최초로 마주쳤다(BC 334. 5/6) (→ 색인 : 그라니코스 강 전투). 페르시아군의 계획은 알렉산드로스가 강을 건너도록 유인하여 육박전으로 그를 살해하는 것이었는데 이 계획이 거의 성공을 거둘 뻔했으나 페르시아군의 전열이 깨지는 바람에 알렉산드로스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다리우스 수하의 많은 그리스 용병들이 학살당했으며 2,000명의 생존자들은 사슬에 묶여 마케도니아로 송환되었다. 이 승리로 소아시아 서부가 마케도니아군에게 노출되었고 대부분의 도시들은 자진해서 서둘러 성문을 열었다 (→ 색인 : 근동). 참주들은 추방되었고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가 시행한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민주주의가 자리잡았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는 장차 자신이 취할 범(汎)헬레니즘 정책을 예고했다. 이 정책은 이미 그라니코스에서 탈취한 300점의 갑옷·투구를 아테네로 보내 아테네 여신에게 공물로 바친 데서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그 공물은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야만인들에게서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와 (스파르타인을 제외한) 그리스인들'이 바치는 것으로 공표되었다(알렉산드로스의 원정사를 쓴 그리스 역사가 아리아노스가 인용한 이 구절은 마케도니아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함). 그러나 도시들은 사실상 알렉산드로스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그는 칼라스를 헬레스폰토스 지방 프리지아의 사트라프로 임명해 페르시아 대왕의 계승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밀레투스가 페르시아 함대의 접근에 고무받아 저항을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강공을 펼쳐 그곳을 점령했다. 그러나 많은 비용이 드는 자신의 해군을 해체했으면서도 해안도시들을 점령함으로써 "페르시아 함대를 육지에서 격파하겠다"고 공언했다. 카리아에서는 할리카르나소스가 저항을 벌이다 진압되자 사트라프인 이드리에오스의 누이이자 미망인인 아다가 알렉산드로스를 자신의 양자로 맞아들였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오빠인 픽소다로스를 추방한 뒤 그녀를 사트라프 직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카리아의 일부 지방은 BC 332년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소아시아와 이수스 전투
BC 334~333년 겨울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 서부를 정복하고 리키아와 피시디아의 산악부족들을 복속시켰으며 BC 333년 봄에는 해안도로를 따라 페르가로 진군했는데, 운좋게도 바람의 방향이 바뀐 덕택에 클리막스 산의 절벽을 통과했다. 이때 해수면이 낮아진 사실을 두고 역사가 칼리스테네스를 비롯한 알렉산드로스 주변의 아첨꾼들은 신의 은총을 나타내는 표시로 해석했다. 프리지아의 고르디움에서 그는 아시아를 통치할 사람만이 풀 수 있다고 하는 고르디우스 왕의 매듭을 칼로 끊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전설은 가공적이거나 적어도 왜곡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 즈음에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함대의 유능한 그리스인 지휘관 멤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리한 상황을 맞이했다. 그는 고르디움에서 앙키라(지금의 앙카라)로 진격하고 이어서 카파도키아와 실리시아 관문(지금의 퀼레크보아지)을 통해 남쪽으로 진출했다. 실리시아에서 그는 한동안 열병에 걸렸다. 한편 다리우스와 그의 대군은 북쪽으로 아마노스 산 동쪽 기슭까지 진군했다. 양측은 모두 잘못된 정보에 따라 행동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이미 미리안드로스(지금의 터키 이스켄데룬 근처)에 진지를 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가 있는 곳 북쪽의 이수스에서 다리우스가 그의 병참선을 차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BC 333 가을). 군대를 돌리다가 알렉산드로스는 피나로스 강을 따라 접근해오는 다리우스를 발견했다. 뒤이은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시아군은 대패하고 다리우스는 가족을 알렉산드로스의 수중에 남겨둔 채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는 여자들을 정중하게 대접하도록 했다.
지중해 해안지방과 이집트의 정복
이수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남쪽으로 시리아와 페니키아까지 진군해 들어갔다. 그의 목표는 페르시아 함대를 기지로부터 고립시켜 전투력을 파괴하려는 데 있었다. 페니키아 도시들인 마라토스와 아라도스는 저항 없이 수중에 들어왔다. 그는 파르메니오를 앞서 파견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다리우스의 군자금을 비롯한 풍부한 전리품을 확보하도록 했다. 다리우스가 평화협상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 그 응답으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역사적 과오를 조목조목 밝히면서 자신을 아시아의 군주로 인정하고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오만한 답장을 보냈다. 비블로스(지금의 주바일)와 시돈(아랍어로 사이다)을 점령한 후 그는 섬도시 티레에서 저항에 마주쳐 입성을 거부당했다. 그러자 그는 모든 포위공격술을 다 동원해 그곳을 점령하려 했으나 티레인들은 저항을 계속하면서 7개월 동안이나 버티었다. 그동안(BC 333~332 겨울) 페르시아군은 소아시아에서 육로로 반격을 가하다가 대(大)프리지아 사트라프 안티고노스에게 패배했으며 해상으로도 반격을 가해 상당수의 도시와 섬들을 되찾았다.
티레 포위전이 진행중일 때 다리우스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곧 자기 가족의 몸값으로 1만 탈렌트의 거액을 지불하고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모든 땅을 양도하겠다는 것이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파르메니오가 "내가 알렉산드로스라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이에 대해 알렉산드로스가 "나 역시, 내가 파르메니오라면 그랬겠지"라고 응수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BC 332년 7월 티레를 함락시킨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큰 군사적 성과였다. 이 과정에서 대살륙이 벌어졌고 여자와 아이들은 농노로 팔려갔다. 파르메니오를 시리아에 남겨두고 알렉산드로스는 아무 저항 없이 남쪽으로 진군하다가 가자 고원에 이르러 그곳 사람들의 치열한 저항으로 2개월 동안 지체했으며 돌격전을 벌이던 중에 어깨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가 이때 옆길로 빠져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전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BC 332년 11월에 그는 이집트에 도착했다. 그곳 사람들은 그를 구원자로 영접했으며 페르시아 사트라프 마자케스는 현명하게 항복하는 길을 택했다. 멤피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어로 '아피스'라고 하는 하피 신에게 이집트의 신성한 황소를 제물로 바치고 파라오들의 전통적인 이중왕관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는 토착 제사장들을 회유하고 그들의 종교를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겨울 동안 이집트의 행정을 재편하면서 그는 이집트인 총독들을 고용하고 반면에 군대의 지휘는 별도로 마케도니아인이 맡도록 했다. 나일 강 서쪽 지류 부근 바다와 마레오티스 호수 사이에 있고 파로스 섬이 방벽 구실을 하는 전망 좋은 지대에 알렉산드리아 시를 건설하도록 하고 로도스 출신 건축가 데이노크라테스에게 설계를 맡겼다. 그는 또한 나일 강 범람의 원인을 찾기 위해 탐험대를 보냈다고도 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는 해안을 따라 파라이토니움으로 행군하고 그곳에서 내륙으로 들어가 유명한 아몬 신의 신탁소를 방문했다. 이때의 힘든 여정은 나중에 그를 칭송하는 내용을 담은 여러 가지 전설로 꾸며졌다. 그가 오아시스 한가운데 있는 신탁소에 도착하자 제사장은 파라오를 맞이하는 전통적인 경배를 그에게 보냈다 (→ 시와 오아시스). 알렉산드로스는 아몬 신에게 자기 원정이 성공할 것인지 물었으나 그에 대한 응답을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 일은 후에 그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설화의 근거가 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신격화'에 기여했다. BC 331년 봄 그는 티레로 돌아와 마케도니아인 부하를 시리아의 사트라프로 임명하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그는 이집트 정복으로 지중해 동부해안 전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하게 장악했다.
BC 331년 7월 알렉산드로스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타프사코스에 있었다. 그는 강을 따라 바빌론으로 내려가는 직접적인 통로를 택하지 않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가로질러 티그리스 강을 향해 나아갔다. 다리우스는 유프라테스 강 건널목에 파견된 마자이오스 휘하의 선발대로부터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받고 그를 가로막기 위해 티그리스 강 위쪽으로 행군했다. 결정적인 전투는 니네베와 아르벨라 사이의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치러졌다. 알렉산드로스는 패배한 페르시아군을 아르벨라까지 약 56km나 추격했으나 다리우스는 자기 휘하의 박트리아 기병대와 그리스 용병대를 이끌고 메디아로 피신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제 바빌론 시와 그 지방 전역을 점령했다 (→ 색인 : 바빌로니아). 바빌론을 그에게 양도하고 항복한 마자이오스가 마케도니아인 군사령관과 함께 통치권을 행사하는 바빌론 사트라프로 인정받았으며 지극히 이례적으로 주화를 만드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집트에서처럼 그 지방의 제사장을 후원하는 정책이 실시되었다. 수도인 수사도 항복했으며 금화 5만 탈렌트에 상당하는 막대한 보물을 내놓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가족을 이곳에서 편안하게 살도록 조치했다. 오욱시안 지방의 산악부족을 격파하고 그는 이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페르시아 본토로 진격해들어갔으며 사트라프 아리오바르자네스가 지키는 페르시아 관문고개를 우회하는 데 성공해 페르세폴리스와 파사르가다에로 진입했다. 페르세폴리스에서 그는 범그리스권의 보복전이 종말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크세르크세스 궁전을 불태웠다. 그 의미가 어떻든 이 행동은 이후에 전하는 이야기에서는 아테네 출신의 고급창녀 타이스의 부추김으로 술취한 김에 벌인 장난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BC 330년 봄에 알렉산드로스는 북쪽의 메디아로 진군해 수도인 엑바타나를 점령했다. 테살리아인들과 그리스 연합군은 본국으로 보내고 이후 그는 순전히 혼자 힘으로 전쟁을 치렀다.
마자이오스를 사트라프로 임명한 데서 드러나듯이 제국에 대해 알렉산드로스는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을 연합해 지배세력을 구축하려는 구상을 갖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당시 백성들의 그에 대한 오해가 더욱 증폭되었다. 다리우스 추격전에 계속 나서기 전에 그는 페르시아의 보물을 모두 모아 하르팔로스에게 맡기고 하르팔로스가 엑바타나에서 재정장관의 자격으로 그것을 관리하도록 했다. 파르메니오도 또한 메디아에 남아 보급수송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도록 조치했다. 아마도 이 노병(老兵)은 그에게 성가신 존재가 되었던 것 같다. BC 330년 한여름에 알렉산드로스는 동부 지방을 향해 빠른 속도로 라가이(지금의 테헤란 근처 라이)와 카스피 해 관문을 통과했으며 카스피 해 관문에서 박트리아 사트라프 베수스가 다리우스를 폐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찬탈자 베수스는 지금의 샤루드 부근에서 접전을 벌인 끝에 다리오스를 칼로 찔러 죽이게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시신을 페르세폴리스의 왕실묘지로 보내 정식으로 예를 갖추어 매장하도록 했다.
동방의 중앙 아시아 원정
다리우스가 죽자 알렉산드로스가 대왕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장애물이 없어졌다. 이 해(BC 330)에 새긴 로도스의 한 명문(銘文)에서는 그를 '아시아(즉 페르시아 제국)의 군주'라고 불렀으며 그 직후부터 아시아에서 발행한 주화에는 왕의 칭호가 덧붙었다. 엘부르즈 산맥을 넘어 카스피 해 지방으로 가서 그는 히르카니아에 있는 자드라카르타를 점령하고 한 무리의 사트라프들과 페르시아 유명인사들에게서 항복을 받고 그중 일부는 원래의 직책에 유임했다. 서쪽으로 아마도 오늘날의 아몰을 목표로 견제작전을 벌여 그는 엘부르즈 산맥에 거주하는 산악부족인 마르디족을 제압했다. 또한 그는 다리우스 휘하에 있던 그리스 용병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제 그의 동방진출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아리아에서 그는 항복하는 척하다가 반란을 일으킨 사티바르자네스를 진압하고 아리아인의 알렉산드리아(지금의 헤라트)를 건설했다. 드랑기아나의 프라다(지금의 세이스탄에 있는 나데알리 근처 또는 파라의 훨씬 북쪽)에서 그는 마침내 파르메니오와 그 일가를 파멸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정예 근위기병대의 지휘관이던 파르메니오의 아들 필로타스가 알렉산드로스 살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당했다. 또한 파르메니오의 부지휘관인 클레안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비밀서신의 지령에 복종해 파르메니오를 암살했다. 이같은 무자비한 조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으나 상대적으로 알렉산드로스의 지위를 강화시켰다. 이제 파르메니오의 지지자들은 모두 제거되고 알렉산드로스의 측근들이 승진했다. 기병대는 각기 4개 대대로 이루어진 2개 부대로 재편되어 한 부대는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오랜 친구인 헤파이스티온이 지휘를 맡고 다른 한 부대는 좀더 나이든 클레이토스가 맡았다. 프라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BC 330년부터 겨울 사이에 헬만드 강 계곡 위쪽으로 밀고 올라가 아라코시아를 지나고 오늘날의 카불이 있는 지점 너머의 산악지대를 넘어서 파로파미사다이족의 땅으로 진입해 그곳에서 카프카즈 산맥 옆에 또다른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이때 베수스는 박트리아에서 찬탈한 대왕 칭호를 가지고 동방의 사트라프들에게 전(全)민족적인 반란을 선동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카와크 고개(고도 3,550m)를 넘어 북쪽으로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식량 부족에도 불구하고 자기 군대를 이끌고 드랍사카(쿤두즈에서 먼 북쪽으로 위치한 것으로 보이며 때로 지금의 바누와 동일시하기도 함)로 진격했다. 허를 찔린 베수스는 옥수스(지금의 아무다리야) 강 너머로 달아났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서쪽으로 박트라자리아스파(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발크)로 진군해 박트리아와 아리아에 사트라프를 임명했다. 옥수스 강을 건너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을 보내 베수스를 추격하도록 했는데 베수스는 그동안 소그디아나의 스피타메네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베수스는 생포되어 매질을 당하고 박트라로 송환되었으며 이후 페르시아의 관례에 따라 코와 두 귀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엑바타나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당했다.
마라칸다(지금의 사마르칸트)에 있던 알렉산드로스는 키로폴리스를 경유해 페르시아 제국의 경계선인 작사르테스(지금의 시르다리야) 강까지 나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투석기를 사용해 스키타이 유목민의 저항을 분쇄하고 강의 북쪽 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들을 무찌른 뒤 내륙까지 추격해들어갔다. 작사르테스 강변에 있는 오늘날의 코젠트 자리에 그는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가장 먼 알렉산드리아'라는 뜻)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한편 스피타메네스는 소그디아나 전체를 반란에 동원하고 사카 동맹국의 한 부족인 마사게타이족들을 끌어들였다. 그는 BC 328년 가을에 이르러서야 원정에서 마주친 가운데 가장 완강했던 적을 격파할 수 있었다. 그해 늦게 그는 옥시아르테스를 비롯해 파라이타케네(지금의 타지키스탄) 산악지대에서 저항을 계속하던 나머지 귀족들을 공격했다. 자원병들이 나서서 옥시아르테스가 거점으로 삼았던 험한 바위산을 점령했으며 포로 가운데는 그의 딸 록사네가 있었다. 화해를 이루려는 의미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와 결혼했다. 나머지 적들은 항복하거나 분쇄되었다.
마라칸다에서 발생한 한 사건으로 알렉산드로스는 대다수 마케도니아인들과 거리가 더 멀어졌다. 그는 술자리에서 다투다가 가장 신임하는 지휘관 중 한 사람인 클레이토스를 살해했다. 그러나 그가 지나치게 자책하는 태도를 보이자 군대는 클레이토스가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사후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의 절대주의에 물들어가는 과정의 한 단계를 의미했다. 이런 경향이 점점 커져갔다는 사실은 그가 페르시아 왕실의상을 즐겨 입은 데서도 표면에 나타났다. 그 직후 박트라에서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에게도 부복(俯伏)을 비롯한 페르시아 궁정의례를 강요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왕을 알현하는 페르시아인들이 익숙하게 여기는 이런 관습이 그들에게는 신을 숭배하는 행위로 다가왔으며 인간을 상대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노골적인 아부로 알렉산드로스로 하여금 자신이 신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갖도록 부추긴 것으로 보이는 역사가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칼리스테네스조차도 그의 기대에 어긋나게 자신을 낮추는 행동을 거부했다. 마케도니아인들의 웃음을 사게 되자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알렉산드로스는 현명한 판단을 내려 그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 직후 칼리스테네스는 왕의 시종들이 꾸민 음모에 은밀히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또는 감옥에서 죽었다는 등 주장이 여러 가지임). 이런 행동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칼리스테네스가 긴밀하게 교제했던 소요학파의 철학자들로부터 지지를 잃었다.
인도 침공
BC 327년 초여름 알렉산드로스는 지휘부가 재편되고 증강된 군대를 이끌고 박트리아를 떠났다. 플루타르코스가 말한 12만 명의 병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노새몰이꾼과 낙타몰이꾼, 의료진, 행상인, 놀이패, 여자와 아이들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보조인력이 포함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전투병력은 아마도 3만 5,000명가량에 불과했을 것이다. 추측하건대 바미안과 고르반트 계곡을 끼고 힌두쿠시 산맥을 다시 넘으면서 알렉산드로스는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짐을 진 절반의 부대는 기병대 지휘관인 헤파이스티온과 페르디카스의 인솔 아래 키베르 고개를 지나가도록 보내고 한편 자신은 공성병기열(攻城兵器列)과 더불어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산맥을 지나 북쪽으로 나아갔다. 스와트와 간다라를 지나 진격한 끝에 인더스 강 서쪽과 부네르 강 북쪽으로 몇 km 거리에 있는 거의 난공불락의 산정도시 아오르노스(지금의 피르사르)를 급습했는데 이는 참으로 인상깊은 탁월한 공성술을 보여준 쾌거였다.
BC 326년 봄 알렉산드로스는 아토크 부근에서 인더스 강을 건너 탁실라로 진입했다. 그곳의 통치자인 탁실레스는 알렉산드로스가 히다스페스(지금의 젤룸) 강과 아케시네스(지금의 케나브) 강 사이의 땅을 지배하는 자신의 경쟁자 포로스와의 싸움을 도와주는 데 대한 보답으로 코끼리와 병력을 제공했다. 6월에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 강 좌안에서 최후의 큰 전투를 치렀다. 그곳에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니케아(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와 알렉산드리아 부케팔라(그곳에서 죽은 자기 말 부케팔로스의 이름을 본뜸)라는 2개의 도시를 건설했으며 포로스는 그의 동맹자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히파시스(아마도 지금의 베아스) 강 너머의 인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가 갠지스 강에 관해 알고 있었다는 증거조차 확실치 않다. 그러나 계속 진격하기를 갈망했으며 히파시스 강까지 나아갔을 때 그의 군대가 명령에 불복해 더이상 열대우림지대를 뚫고 행군해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심신이 지쳐 있었고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주요 지휘관 4명 중 한 사람인 코이노스가 그들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군대의 결심이 완강하다는 것을 알고 알렉산드로스는 회군하는 데 동의했다. 히파시스 강변에서 그는 올림포스의 12신에게 바치는 12개의 제단을 세웠으며 800~1,000척가량의 함선을 지었다. 이어서 포로스를 남겨놓고 절반의 병력은 배에 싣고 절반은 양쪽 강둑을 따라 3개 대열로 인더스 강까지 행군하도록 했다. 함대의 지휘는 네아르코스가 맡았고 알렉산드로스가 탄 배의 함장은 오네시크리토스였다. 이 두 사람은 후에 원정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이 행군은 많은 전투와 무자비한 학살을 수반했다. 히드라오테스(라비) 강 부근의 말리 성읍을 습격할 때 알렉산드로스는 심한 부상을 입고 몸이 쇠약해졌다.
인더스 강 삼각주의 정점에 자리잡은 파탈라에 도착한 그는 항구와 계선장을 짓고 당시에는 쿠치의 란 강으로 흘러들어갔던 것으로 추측되는 인더스 강의 양쪽 지류를 탐사했다. 그는 일부 병력을 이끌고 육로로 되돌아갈 계획을 세웠으며 한편 나머지 병력은 100~150척가량의 함선에 나눠타고 해군 병력이 있는 크레타인 네아르코스의 지휘 아래 페르시아 만을 따라 탐사여행을 계속하는 계획을 세웠다. 지방민들의 반대로 네아르코스는 BC 325년 9월에야 돛을 띄웠으며 3주간을 기다려 10월말에 들어가서야 북동계절풍을 만날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도 9월에 출발해 해안선을 따라 게드로시아(지금의 발루키스탄)를 지나갔다. 그러나 산악이 많은 지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내 내륙으로 방향을 돌려야 했으며 그리하여 함대의 식량저장소들을 설치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미 그는 고급장교인 크라테로스의 인솔 아래 하물과 공성병기열, 코끼리, 병자와 부상자를 비롯해 3개 대대의 방진부대를 물라 고개와 퀘타, 칸다하르를 지나 헬만드 강쪽으로 가도록 떠나보낸 참이었다. 드랑기아나를 지나 행군해 카르마니아의 아마니스(지금의 미나브) 강변에서 본대와 다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게드로시아를 지나 행군하면서 무수한 재난을 겪었다. 물없는 사막지대와 식량 및 연료의 부족으로 사람들은 큰 고통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특히 여자와 아이들이 와디(사막지대의 물이 흐르지 않는 강)에 진지를 치고 있다가 갑작스런 우기의 홍수에 쓸려 죽었다. 이런 고생끝에 마침내 아마니스 강변에서 그는 역시 많은 손실을 겪은 네아르코스의 함대와 다시 만났다.
제국의 강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최전성기 |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를 떠나기 전부터 착수했던 상층 관리들을 교체하고 태만한 총독들을 처단하는 정책을 이제 더 한층 밀고나갔다. BC 326~324년에 사트라프 1/3 이상이 교체되고 페르시스와 수시아나, 카르마니아, 파라이타케네 등지의 페르시아인 사트라프를 비롯한 6인이 처형되었으며 코이노스(그는 약간 앞서 죽었음)의 동생 클레안드로스를 비롯한 메디아의 장군 3인이 금품강요죄로 고발당해 카르마니아로 소환되고 그곳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이후로 알렉산드로스가 자기 휘하의 총독들에 대해 보인 엄격한 태도는 어디까지가 자기 부재중에 저질러진 엄청난 실정에 대한 본보기로 처벌하는 것이고 어디까지가(필로타스와 파르메니오의 경우처럼) 자신이 불신하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에 관해 호의적인 내용을 담은 고대의 자료에서도 그의 가혹한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한 논평을 담고 있다.
BC 324년 봄에 엘람의 수도이며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중심지인 수사에 돌아왔다. 그가 디오니소스로 분장하고 술찬지를 벌이며 카르마니아를 지나왔다는 이야기는 전혀 가공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윤색된 면이 있다. 그는 재정장관 하르팔로스가 공금횡령으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6,000명의 용병과 5,000탈렌트를 가지고 그리스로 도망쳤다는 것을 알았다. 아테네에서 체포된 하르팔로스는 달아났다가 이후에 크레타에서 살해당했다. 수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정복을 기념하는 잔치를 열고 그 자리에서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을 하나의 지배민족으로 융화시키는 정책을 더욱 장려하기 위해 자신을 비롯한 80명의 공직자들이 페르시아 여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도록 했다. 그와 헤파이스티온은 각기 다리우스의 딸인 바르시네('스타테이라'라고도 함)와 드리페티스에게 장가들었으며 토착민을 아내로 맞은 1만 명의 병사들은 후한 지참금을 보상으로 받았다.
이러한 민족동화정책은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변화된 제국개념에 동조하지 않는 마케도니아인들 사이에 갈수록 더 큰 마찰을 가져왔다. 페르시아인을 동등한 조건으로 군대와 지방행정기관에 받아들이기로 한 그의 결정은 심한 원성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거기에다 마케도니아식 군사훈련을 받은 3만 명의 토착민 청년들이 도착하고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 아라코시아 등지에서 온 동양인들이 기병대에 들어옴으로써 불만은 더욱 커졌다. 이전에도 동양인들이 기병대에 복무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그들은 별개의 대대로 편성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다가 페르시아의 귀족들이 왕실 근위기병대에 받아들여졌다. 페르시스의 새 총독인 페우케스타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다수 마케도니아인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BC 324년 오피스에서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크라테로스 휘하의 마케도니아 퇴역군인들을 본국으로 보내도록 결정했는데 이 결정이 사람들에게는 권좌를 아시아로 옮기기 위한 조치로 비쳤다. 왕실 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군대에서 공공연한 명령불복종이 일어났으나 알렉산드로스가 자기 군대 전체를 해산하고 대신 페르시아인들을 군적에 올림으로써 반대세력이 분쇄되었다. 곧 9,000명이 참가한 대규모의 감동적인 화해잔치가 열려 오해의 종식 및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의 동반정치를 기념했다. 그러나 이는 줄곧 주장되었듯이 모든 백성들이 동반자로 국가에 편입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1만 명의 퇴역군인들이 선물을 받고 마케도니아로 돌아갔으며 위기가 가라앉았다.
BC 324년 여름 알렉산드로스는 또다른 문제, 곧 유랑하는 용병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용병은 아시아와 그리스에서만 수천 명에 달했으며 그 대부분은 자기 도시에서 쫓겨난 정치적 망명자들이었다. 니카노르가 올림피아에서 선포한(BC 324. 9) 포고령은 그리스 동맹에 속한 그리스 도시들(테베인은 제외)에 모든 망명자와 그 가족들을 되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이 조치는 알렉산드로스의 총독 안티파트로스가 그리스 도시에서 유지해온 과두정치 체제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안티파트로스를 소환하고 크라테로스를 그 자리에 앉히려고 구상했으나 그의 죽음으로 이 계획은 미처 실행되지 못했다.
BC 324년 가을 헤파이스티온이 엑바타나에서 죽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죽은 데 대해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 그의 장례는 바빌론에서 왕실장으로 치러졌으며 화장용 장작에만 1만 탈렌트의 비용이 들었다. 아마도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들에게 헤파이스티온을 영웅으로 기리도록 하는 일반명령을 공표하면서 그와 관련해 자신이 신과 같은 영예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 색인 : 신성한 왕권). 오랫동안 그는 자신의 신성(神性) 문제에 골몰해 있었다. 그리스인의 사고 속에서는 신과 인간의 경계선이 분명하게 그어져 있지 않았다.
전설에는 자신들의 업적으로 신과 같은 지위를 획득한 인간들의 예가 여럿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업적을 디오니소스나 헤라클레스의 업적과 비교해보도록 고무받은 적이 있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신성에 대해 확신을 갖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도록 요구하게 되었다. 그의 요구가 어떤 정치적 배경을 깔고 있었다고 볼 이유는 없다(신적 지위를 갖는다고 해도 그가 그리스 도시에서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은 아니었음). 오히려 그것은 과대망상증과 정서적 불안정이 점점 심해지는 징후였다. 그리스 도시는 강요에 못이겨 그에 따랐으나 종종 반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스파르타의 포고령은 이런 식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신이 되기를 바라니까 그를 신으로 삼도록 하자."
BC 324년 겨울 알렉산드로스는 루리스탄 산악지방에 사는 코사이아족을 상대로 잔혹한 보복전을 벌였다. 다음해 봄 바빌론에서 그는 리비아인들과 이탈리아의 브루티움인, 에트루리아인, 루카니아인이 보낸 하례사절들을 영접했다 (→ 색인 : 바빌로니아). 그러나 카르타고인과 켈트족, 이베리아인, 그리고 심지어 로마인까지 사절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지어낸 것이다. 그리스 도시에서도 알렉산드로스의 신적 지위에 걸맞게 화관을 쓴 대표사절을 보냈다. 네아르코스의 항해로를 뒤쫓아 그는 이때 티그리스 강 하구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고 인도와 해상교역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이를 위해 아라비아 해안을 따라 예비 탐사를 하도록 했다. 그는 또한 관리였던 헤라클레이데스를 파견해 히르카니아(카스피) 해를 탐험하도록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유프라테스 강의 관개시설을 개량하고 페르시아 만 해안지방에 정착촌을 만드는 사업계획으로 분주하던 중에 장시간의 연회와 술잔치 끝에 갑자기 병에 걸렸다. 10일 후인 BC 323년 6월 13일 그는 33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12년 8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의 시신은 나중에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로 빼돌려 결국에는 황금관에 넣어 알렉산드리아에 안치했다. 이집트와 그밖의 그리스 도시에서 그는 신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왕위 후계자가 지명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휘하 장군들은 필리포스 2세의 약간 얼빠진 서자인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와, 록사나에게서 난 알렉산드로스의 유복자 알렉산드로스 4세를 공동 왕으로 지명하고 자신들끼리 여러 차례의 담합을 거쳐 사트라프직을 나누어 가졌다.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나자 제국은 하나의 단위로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아리다이오스는 BC 317년에,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4세는 BC 310(또는 BC 309)년에 살해당했다. 속주들은 독립적인 왕국이 되었으며 BC 306년 안티고노스를 필두로 장군들이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 색인 : 디아도코이).
평 가
알렉산드로스가 품었던 구상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정보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로스가 기록한 웅대한 지중해 서부 정복 계획과 세계왕국의 건설 구상은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후계자들과 군대는 그 계획을 이내 포기했다. 그가 살았더라면 파플라고니아·카파도키아·아르메니아가 아직 실질적인 독립을 누리고 있었던 소아시아의 정복이 완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년에 알렉산드로스의 목표는 특히 아라비아와 카스피 해를 탐험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던 것같다.
자기 제국을 편성할 때 알렉산드로스는 많은 분야에서 기존에 있던 것들을 찾아내서 즉흥적으로 꾸미고 각색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재정정책은 예외였다. 자세한 내용을 완전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지방 사트라프로부터 독립된 징세관 중앙조직을 설치했음이 분명하다. 이 방식이 실패로 돌아갔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재정장관인 하르팔로스의 성품이 유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에서 통용되던 복본위제(復本位制) 대신에 아테네의 방식에 입각해 은본위제의 새 주화를 제정한 것은 도처에서 교역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아울러 페르시아 국고에서 방대한 양의 은괴가 방출된 사실과 더불어 전체 지중해권의 경제에 꼭 필요한 활력소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새 도시 건설은 그리스의 세력확대에 새 장을 열었다(플루타르코스가 꼽은 것은 70개가 넘음). 결코 자원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많은 정착민들이 그 도시를 끝내는 떠난 것이 사실이고 또한 토착여성과 결혼해 그리스적 관습이 희석되기도 했지만 그 대부분의 지역에서 마케도니아의 영향이 아닌 그리스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으며 셀레우코스 왕조의 알렉산드로스 후계자들에 의해 그 과정이 더욱 진전되면서 그리스의 사상과 관습이 멀리 박트리아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 널리 전파되었다. 이는 참으로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이 가져온 가장 두드러진 영향의 하나라고 할 만하다(→ 색인 : 알렉산드리아, 헬레니즘).
반면에 그의 민족동화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란인 사트라프는 유력한 역할을 하지 못해던 것으로 보이며 18명 중에 10명이 제거되거나 처형당했다. 그 사법적 판단근거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마케도니아인 지도자와 일반인 모두 그 구상을 거부했고 이후의 셀레우코스 제국에 이르러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출신들이 뚜렷하게 지배세력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알렉산드로스가 계속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광대한 영토를 통일적으로 관리하는 데 어느 만큼 성공을 거두었을지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합스부르크 제국보다 더 분산적이고 더 광범위한 하나의 제국을 이룬 무수한 단위들은 오직 알렉산드로스 개인을 유일한 고리로 해 결속되어 있었을 뿐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그는 죽었다.
당시에 제국을 하나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로스 특유의 역동적인 성품 덕택이었다. 그는 자기자신과 자기사람들을 극한까지 몰고가는 강철 같은 의지와 능력에다 부드럽고 유연성 있는 사고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물러설 때와 정책을 바꾸어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또한 풍부한 상상력을 지녔고 낭만적인 충동도 없잖아 있었다. 아킬레스와 헤라클레스, 디오니소스 같은 인물들이 종종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아몬의 신탁소에서 그런 경배를 받은 일이 이후 그의 생각과 야망에 줄곧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오랜 원정에 따른 긴장된 생활 속에서 쉽게 화를 내는 경향이 갈수록 두드러졌다. 무자비하고 고집센 인물이었던 그는 폭력행사가 늘어났으며 정당한 재판절차를 가장하든 않든 간에 자신이 더이상 신뢰하지 않는 인물일 경우는 추호도 망설임 없이 제거했다.
그가 죽은 지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마케도니아 제국 섭정이었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델포이에 있는 알렉산드로스의 조상 옆을 지나갈 때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부하들의 충성심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불평없이 히파시스 강까지 그를 따라갔으며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그에 대한 믿음이 변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일시적인 기분에서 미지의 인도로 그들을 더 멀리 끌고가려고 했을 때만 그의 뜻대로 일이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지휘관으로서 알렉산드로스는 일찍이 세상에 알려진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서로 다른 무기들을 결합해서 사용하는 데 비상한 재능을 보였을 뿐 아니라 사카 유목민이라든가 인도의 산악부족, 포로스의 코끼리 부대같이 새로운 형태의 전투방식을 사용하는 적들의 도전에 맞추어 전술을 변화있게 구사하는 데도 뛰어났다. 그의 전략은 능숙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는 매번의 전투에서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계기를 놓치지 않고 활용했으며 또한 빈틈없는 추격전을 벌여 승세의 이점을 마지막까지 살렸다. 또한 기병대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보병을 동원해 결정타를 가해야 될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짧은 재위기간은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으로 작용했다. 그의 원정과 과학탐구에 대한 개인적 관심 덕분에 지리학과 박물학 분야에서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의 활약으로 문명의 커다란 중심이 동방으로 옮겨졌으며 그리스 지방왕국들의 새 시대가 열렸다. 광범위한 식민지개척의 물결을 타고 헬레니즘이 근동 전역에 전파되었고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경제적·문화적으로는 지브롤터에서 펀자브에 이르기는 넓은 단일 세계가 창조되었다. 이 세계는 광범위한 무역과 사회적 교류의 길이 열려 있었고 상당한 정도의 공통적 문명을 지녔으며 그리스의 코이네(koin)어를 공용어로 썼다. 로마 제국의 건설과 그리스도교가 세계종교로 보급된 것, 비잔티움이 오랜 기간 존속한 것들은 모두가 어느 정도는 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한 업적의 결실이라고도 볼 수 있다.
F. W. Walbonk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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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arch for Alexander : Robin Lane Fox, 1980
The Nature of Alexander : Mary Renault, 1975
Alexander der Gross : Jakob Seiber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72
Alexander the Great : Peter Green, 1970
Alexander the Grosse, Ingenium und Macht : F. Schachermeyr, A. Pustet, 1949
"알렉산드로스 3세"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members.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4a3591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