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소련의 역사

蘇聯 歷史

History of Russia and the Soviet Union


여러 세기 동안 동유럽과 아시아 북부에 걸쳐 있던 다민족국가인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

초기에는 여러 공국의 연합체였으나 1408년부터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전제국가가 되었고 1721년부터는 러시아 제국이 되었다. 1917년 혁명을 거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형성되었으나 1991년 해체되어 지금의 독립국가연합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시초부터 1700년경까지

 

선사시대와 루시(로스 - 겔 38:2~3, 39:1)의 발흥

BC 2000년부터 인도유럽어족과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는 민족들이 소련 땅 유럽 지역을 점령했으나 그 민족의 실체와 제도, 활동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고대에 그리스인과 이란인의 취락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최남단 지역에 출현했고 4∼9세기에는 동슬라브족이 엘베 강과 프리퍄티 습지 일대로부터 남쪽과 동쪽으로 흩어져 살았다. 9세기에 남쪽·북쪽에서 온 북유럽과 중동의 모험상인들이 이곳에 침투함으로써 새로운 경제·문화·정치 세력과 접촉하게 되었다.

770∼830년경 발트 해 연안과 이란 및 북아프리카에서 상업적 탐험가들이 볼가 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강인하고 운이 좋았던 이들은 동방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던 중 호박(琥珀)·모피·꿀·밀초·목재 등을 발견하여 막대한 부(富)를 얻었다. 토착민들은 이들의 침입에 거의 저항하지 않았으며, 거래나 공물이나 약탈물에 대한 수지를 협상할 만한 지방자치기관도 없었다. 830년을 전후하여 스칸디나비아 상인들이 북(北)볼가 강 유역의 랴잔 부근에 교역도시를 건설했다. 이슬람권과 서유럽의 문헌에는 이곳을 통치한 루시 최초의 명목상 지배자('하칸' 또는 '카간'으로 불렸음)가 언급되고 있다. 이 볼가 강 유역 루시의 카간 국이 키예프 공국으로 이어질 최초의 정치단위였다.

수십년에 걸쳐 루시인들은 스칸디나비아인 집단과 함께 남쪽으로 볼가 강의 주요 수로를 따라 약탈지역을 넓혀 바그다드와 콘스탄티노플까지 이르렀다. 이 정복활동에 참여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바랴크족으로서 그중의 한 공후(公侯)인 유틀란트의 류리크가 1598년까지 동슬라브를 통치한 왕조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대략 930∼1000년에 걸쳐 이 지역은 노브고로트를 거점으로 삼은 바랴크족이 완전히 지배했다. 이 기간에 발트 해로부터 흑해까지의 통상로가 개발되었고, 이로 인해 키예프 공국의 경제생활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정치·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바랴크족이 키예프 공국 건설에 기여한 정도는 18세기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상당한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키예프

 

키예프 루시(10~11세기)

이 동슬라브 첫번째 국가의 역사는 그후 바랴크족의 가장 위대한 공후인 스뱌토슬라프 공(972 사망)부터 전개된다. 그는 바랴크족의 다른 중심지와 하자르족 및 볼가불가르족에 원정하여 승리하고, 968∼971년에는 비잔틴제국과 도나우불가르족과의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그 일족이 루시 내에서 완전히 패권을 차지했으며, 동유럽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출현했음을 알려주었다. 그의 아들 블라디미르(980경∼1015 재위)는 최초의 법전을 반포하고, 흩어져 있는 루시 영토를 다스릴 정치조직으로 그의 일족을 종가(宗家)로 하는 왕조체제를 이룩해, 988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하여금 러시아에 주교구를 설립하도록 권유하고 이를 허용했다. 그는 영토를 돈·드네프르·드네스트르·네만·서(西)드비나·상(上)볼가 강 등 여러 강의 분수령을 포함하는 자연 경계선까지 확장했지만 블라디미르나 그의 후계자들이 그 광대한 영토에서 오래도록 안정된 정치를 펴지는 못했다. 제1차 십자군원정(1096∼99) 때 통상로가 동서에서 남북으로 크게 바뀌어 중앙정권의 몰락이 가속화했으며, 류리크 왕조 내 공후들간의 싸움으로 북부와 서부의 변경지대를 따라 새로운 수출무역 형태가 발전하면서 지역 분리주의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다.

키예프 루시의 사회·정치 제도에 관한 자료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그런 제도들이 아직 초보단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공후들은 저마다 보야르(대귀족)로 구성된 수행원을 거느렸으며, 그 수행원들은 지정된 영토에서 소득을 올리는 특권을 얻는 대가로 충성의 예와 군역(軍役)을 바쳤다. 서유럽과는 달리 키예프에서는 봉건주의와 관련된 복잡하고 고도로 규제된 법률적·경제적 관계가 발달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은 그런 자료가 희박한 것으로 알 수 있다. 키예프의 정치제도는 본래 삼림 생산물을 외국과 교역하기 위해, 또 이 교역을 근거로 존재했으며, 인구의 태반이 참여하지 않는 화폐경제에 의존했다. 외형적인 문화는 주로 남슬라브족의 중개를 통해 들어온 비잔틴의 다민족 합성문화에서 생겨났다.

키예프가 쇠퇴함에 따라 루시는 각 공국들로 분열했다. 이들 동슬라브 지역 각각의 특성과 역사적 성쇠는 20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다음은 그중 가장 중요한 공국에 관해 간략히 기술한 것이다.

 

루시의 영토

노브고로트 공국은 9세기에 처음 내륙의 삼림지를 개척하기 위한 중심지로 생겨나 키예프 시대에 줄곧 가장 중요한 상업 중심지 역할을 했다. 키예프 시대 후기의 여러 가지 변화도 노브고로트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 도시가 한자 동맹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또 이 도시의 중요한 수출창구 역할을 한 상(上)볼가 강 유역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혜택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류리크 가문 최초의 거점으로서, 키예프를 점령하기 위한 수차례의 원정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키예프의 공후들이 왕위쟁탈전 중에 바랴크족의 원군을 모으기 위해 빈번히 이곳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키예프와 키예프 이후의 다른 중심지들의 특징이 된 공후의 전통은 노브고로트에서는 전혀 발달하지 않았다. 키예프가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을 때 노브고로트는 키예프 대공의 형제가 아닌 대공의 아들이 다스렸으며 대공의 형제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성읍을 차지했다. 키예프가 쇠퇴하자 노브고로트는 대공의 지배권에서 독립을 선언했고(1136), 주변의 여러 세습 공후들로부터 섭정 왕자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모스크바 공국이 득세할 때까지 주권도시의 지위를 지켰다.

이 기간에 루시의 북서부 영토인 스몰렌스크·폴로츠크·투로프·핀스크 공국의 영토 가운데 많은 부분을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동(東)리투아니아의 이교도 계통의 외국인 왕조가 벨로루시인과 우크라이나인 중심의 주민들을 다스리는 나라로서 본질적으로 민족국가는 아니었다. 이 왕조는 15세기경에 슬라브 문화에 동화되었으며(벨로루시어의 한 방언이 공용어로 쓰임), 그 융성기(1392∼1430)에는 대(大)러시아 본토 바깥쪽의 옛 키예프 영토 전체, 즉 현재의 리투아니아·벨로루시·몰도바·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1385년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 왕국과 결합했다.

훗날 모스크바 대공국의 심장부가 될 북동부 영토인 오카 강과 볼가 강 유역에는 핀족의 한 부족이 정착해 있었으며, 슬라브족이 새로 이동해와 이들과 뒤섞였고 그뒤 노브고로트와 발트 해 연안에서 슬라브족이 본격적으로 몰려왔다. 블라디미르 공국 최초의 중심지인 로스토프는 블라디미르 시대부터 공후들의 통치지역이 되었다. 12세기에 로스토프는 새로운 중심지로 블라디미르를 건설한(1108)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작은집 가계의 세습령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정치·문화는 모노마흐의 아들 유리 돌고루키(1125∼57 재위)와 손자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1157∼74 재위) 통치 때 높은 수준에 달했으며, 그 후 수십 년 간 꽃을 피웠다. 13세기초에는 블라디미르 대공국 내에 하나의 왕자령으로 모스크바 공국이 창건되었으며, 새로운 도읍 모스크바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동생 미하일 호로브리트가 블라디미르를 정복(1248)하여 두 도시의 공후가 되면서 중요성이 커졌다. 네프스키의 아들이며 이후 모스크바를 통치한 류리크 왕조의 선조인 다닐로는 장기간(1276∼1303) 훌륭히 통치했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는 오늘날 모스크바 주의 영역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모스크바가 훗날 지배적인 위치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다닐로의 아들 이반이 통치(1328∼41)하면서부터였다. 이반은 킵차크 한국의 칸 우즈베크와 힘을 합쳐, 그리고 재빨리 토지를 매입해(세금징수 청부권을 이용한 듯함) 공국의 세력을 크게 넓혔다.

루시의 남서부에 있는 갈리치아와 볼리니아 지방은 키예프와는 인종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항상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농업이 고도로 발달했는데 특히 값비싼 토산품인 소금은 주로 육로를 따라 서쪽지방 사람들과 거래되었다. 이미 1100년경에 독립공국이 된 갈리치아는 키예프가 쇠퇴함에 따라 성장했다. 그후 볼리니아의 로만 므스티슬라비치(1199∼1205 재위)가 갈리치아를 정복하여 두 공국을 통일했다. 그의 아들 다닐(1201∼64) 시대에 갈리치아 대지주들과의 알력과 헝가리군과의 충돌로 공국은 쇠퇴하여 1240년에 침략해온 몽골군에게 정복되었다. 그후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볼리니아)와 폴란드(갈리치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몽골지배기

 

킵차크 한국의 최대 영토

1223년 볼리니아·갈리치아·폴로베츠(남부 초원지대의 터키계 유목민) 연합군이 칼카 강변에서 키예프의 옛 영토에 침입한 최초의 몽골군 정찰대에게 궤멸의 참화를 당한 것은, 수세대에 걸쳐 류리크 가문의 여러 공국이 그들 못지않게 분열된 폴로베츠의 씨족집단과 복잡한 동맹관계를 맺고 때때로 전쟁을 벌인 결과였다. 몽골군의 침입 당시 키예프는 폐허가 되어 있었고, 노브고로트는 통상이나 북방 인접국과의 관계에 여념이 없었으며, 갈리치아는 내부 분열의 와중에서 폴란드와 헝가리의 왕조 분쟁에 깊이 휘말려 있었다. 공국의 맹주격인 블라디미르 수즈달공국의 능력으로는 승마와 활 솜씨가 뛰어난 전사들로 잘 조직된 초원의 기마부대인 당대 제일의 몽골군에 맞설 방법이 없었다 (→ 색인 : 칼카 전쟁).

연대기를 편찬하는 수도사나 궁중에서 찬양의 시를 읊는 사람들의 작품에서 비롯된 구전 경건문학은 최초의 몽골인 원정대의 파괴와 이에 대한 저항을 모두 과장하고 있다. 몽골인들의 목적은 대대로 중앙아시아 초원을 가로지르며 이루어지던, 유목민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무역을 통일된 정치체제하에 소생시키는 데 있었다. 그들은 서진하는 과정에서 투르크계 유목민 집단과 옛 비단길이 지나는 도시에 사는 많은 이란인과 이슬람교도 상인들에게서 쉽게 도움을 받았다. 반면, 정착민들의 행정중심지나 지주계급의 지배층으로부터는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러시아의 영토는 몽골인들이 이미 정복한 중앙아시아 지역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교역이 활발했던 땅은 여러 공국으로 산산조각나 서로 싸우고 있었다. 몽골인들은 그곳에서 병력을 보충할 수도 있었는데 드네프르 강 하류와 볼가·돈 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는 폴로베츠인과 크림 반도 및 상볼가 강 유역의 도시에서 장사하는 이슬람교 상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몽골군의 길을 안내해 처음(1223)에는 크림 반도 및 볼가 강을 거슬러 옛 상업 중심지인 볼가리로 가는 길을, 다음(1236)에는 랴잔과 로스토프 그리고 수즈달의 도시로 가는 길을 찾아주었으며, 그후(1240)에는 키예프와 갈리치아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정복된 도시 가운데는 복구되어 새로 번창한 곳도 많았다. 키예프 등 몇몇 도시는 몽골 시대에는 복구되지 않았지만,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의 도시는 눈에 띄게 번영했다. 모스크바와 트베리 같은 새로운 중심지는 그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몽골 시대에 들어와 성장하고 번창했다.

이와같이 몽골의 침입이 어디에서나 비극적 결말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지방 공후가문은 변함없이 전통을 이어나갔으며, 새로운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전사한 공후도 있었지만 슬라브족의 영토에서 외국인 왕조가 수립된 일은 전혀 없었다. 정복이 끝난 뒤 우랄 산맥 서쪽 지역에 남아 있는 몽골인은 소수여서 정치적·재정적 행정은 몇 세대 전부터 이 지역에서 활동해온 투르크계의 씨족 지도자들과 이슬람교 상인들에게 맡겨졌다. 북노브고로트 지방에서 타타르가 직접 정권을 잡은 적은 없었으며, 자치도시의 총명한 시민들이 칸과 예의바른 관계를 유지했다.

칭기즈칸의 아들로 제국의 서부를 상속한 주치를 시조로 하는 주치조(朝)는 볼가리와 크림의 옛 중심지를 복구하려고 잠시 노력하다 새 수도 이틸을 건립했다. 이 수도는 1260년경 지금의 볼고그라드 근방의 '신(新)사라이'로 옮겨갔다. 이 도시들이 훗날 '황금군단'으로 불리게 되는 킵차크 한국의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이다. 킵차크 한국은 동슬라브의 영토를 속국으로 한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으며 최전성기에는 크림 반도, 도나우 강에서부터 우랄 강까지의 폴로베츠 스텝지대, 볼가리 제국의 옛 영토(모피가 풍부한 몰도바 삼림지와 서시베리아의 여러 지역을 포함),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주치조의 문화적 수도 우르겐치를 포함하는 옛 화리즘 왕국에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슬라브의 영토는 토착 공후들에게 위임 통치되었는데, 그중의 일부는 몽골 제국의 수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증거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타타르인 통치자들은 적어도 처음 100년 동안은 백성들을 착취하기보다는 통상을 증진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다.

그러나 다수민족으로 이루어진 타타르인의 상업 제국은 불안정했으며, 내부의 권력투쟁은 제국을 약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1380년 타타르인은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에게 극적인 패배를 당했다. 타타르인은 러시아의 영토들을 재편하고 재정비했지만, 황금군단은 이때 패배한 후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황금군단의 몰락은 모스크바, 리투아니아, 불가리 지역 및 크림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5세기초의 일련의 권력투쟁 후 모스크바는 대러시아 영토의 맹주로 부상했는데, 모스크바가 이런 지위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스크바는 주요수운망이나 초원과 연결되는 북동부의 요지를 차지한데다 주요 모피 생산지와 인구가 가장 밀집된 농업지대와 가까웠고, 현명하고 장수한 공후들이 잇달아 통치했던 것이다.

 

모스크바 공국

 

러시아의 팽창(1300~1796)

모스크바의 권력투쟁은 15세기초,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손자가 왕통을 자기의 가계로 고정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종식되었다. 돈스코이의 증손, 대제 이반 3세(1462∼1505 재위)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포함하여 동슬라브의 전영토를 통일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그는 효과적으로 군사·외교 활동을 펴 모스크바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작업을 완수할 책임이 있다는 신념을('멍에'는 이미 오래전에 스스로 떨어져나갔지만) 갖게 했다. 이반의 재위기간에 체계적인 관료정치와 토지제도도 발전했다. 군복무자들에 대한 토지대여제도는 수도원 소유지를 둘러싼 심각한 갈등을 유발했고, 중부지방 자유농민들의 농노화를 촉진했다.

이반의 아들 바실리 3세(1505∼33 재위)는 군주정치를 대폭 강화하고 프스코프·랴잔·스몰렌스크를 병합했다. 또한 수도사와 평신도의 토지보유 한계 및 이 토지에 딸린 면책특권을 축소시켰다. 이런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그는 대귀족보다는 새로운 관료집단과 젠트리를 신뢰했으므로 대귀족 세력이 쇠퇴했다.

1533년 바실리가 죽은 후 그의 정책은 대공비 예레나가 이어받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1538년에 그녀가 죽자 반(反)대귀족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각 파의 귀족들이 국가기관을 장악하려 했다. 10년 동안 혼란기를 거친 뒤 국가의 필요성을 깨달은 관료, 성직자, 모스크바 대귀족은 강력한 동맹체를 결성해 정권을 장악하고 일련의 개혁에 착수했다. 이 동맹체는 바실리의 아들 이반을 좌지우지하려는 속셈에서 차르로 추대하고 새로운 법전을 편찬했으며, 군대를 개편하고 지방행정 개혁에 착수했다.

뇌제(雷帝)로 알려진 이반 4세는 1544년에 왕위에 오른 이래 유력한 정치가들의 수중에서 오랫동안 꼭두각시 역할을 한 듯하다. 개혁가들은 많은 군사원정을 계획하면서 이와 관련해 국가의 행정을 근대화·표준화시키고자 했다. 1557년에는 이런 군사원정에 대해 군부의 최고위층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다. 이반은 반대파의 편을 들었으며, 처음으로 자주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리고 일단 전권을 장악하자 공위(空位) 기간에 정권을 맡았던 자들과 그들이 만든 행정기구를 와해시키기 시작했다.

이반이 1564년에 국토와는 별도로 왕실소유지로서 자신이 직접 관리하려고 설치한 유명한 오프리치니나는 기성 통치체제에 대한 그의 증오와 몰이해를 드러낸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새로이 관료체제를 대폭 단순화시키고, 노련한 정치가를 쫓아내고 공포분위기로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아첨꾼과 용병들로 왕실을 채웠으며, 국가 근대화에 공헌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데 열을 올렸다. 또한 이 시기에 막대한 경비와 손실을 가져온 기나긴 리보니아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오프리치니나에서 촉발된 파멸의 길을 재촉했다. 1584년 이반은 죽음을 앞두고 아첨꾼들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했지만 나라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모스크바는 이반의 살아 남은 외아들과 결혼한 여자의 오빠인 보리스 고두노프(1598∼1605 재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고두노프는 이반 시대에 입은 손실을 복구하는 데 외견상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치세는 스웨덴과 싸워 이긴 짧은 전쟁 기간을 제외하고는 태평시대였으며, 그는 다시 이전의 근대화와 표준화 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가 미해결로 남았으며 특히 대귀족의 불만과 반대는 해소되지 않았다. 왕위 계승권자임을 주장하는 첫번째의 이른바 '가짜 드미트리'가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가짜 드미트리의 지원군은 쉽사리 격퇴당했지만 고두노프도 몇 주 후에 죽고, 대귀족들이 고두노프 가문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드미트리를 차르로 추대했다. 이어 '혼란시대'(1606∼13)가 뒤따랐다. 모스크바 공국의 중심부는 혼란에 빠지고, 드미트리가 끝내 암살당했으며, 2번째의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났고, 폴란드가 침략해왔다. 모스크바의 세력집단들은 폴란드에 대항하기 위해 결집했으며 1613년에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선출했다.

15, 16세기의 사회·경제 국면은 3가지 과정이 서로 맞물려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들은 꾸준한 경제성장, 중앙정부의 세력 확대, 그리고 과거 자유농민이 보유하던 토지에 대한 귀족들의 찬탈과 그로 인한 자유농민의 감소와 농노화의 진행이다. 이 시기에는 러시아 문화로 볼 수 있는 문화가 싹텄는데, 이는 중앙집권제도를 계속 강화한 견실한 군주제하에 통합된 대러시아인의 성장과 번영이 밑거름이 되었다. 교회는 정부의 엄격한 정치적 통제하에 문화·유행·이데올로기를 지배하면서 모스크바의 상류문화가 된 민족적·독재적 요소와 러시아 정교회의 요소를 독특하게 합성해냈다.

로마노프 정부가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고 경제와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기까지는 10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정치적 회복은 중앙정부 관료들의 존속과 국정을 맡은 소수 독재자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후에 이루어진 발전은 17세기 이들 집단의 성장과 통합, 그리고 순조로운 세력 확장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혼란시대 말엽에는 대귀족과 전문 행정가가 관료의 기능을 맡았으나 그후 100년도 안 되어 모든 상인계층·귀족계층·성직자들이 도처의 관료직을 차지했다. 중앙기관의 세력이 다른 모든 정치·사회 집단을 압도하며 쉽사리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방기관이 취약하고 독립된 교회나 사회적 권력이 없었던 데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1649년의 대법전에 반영되었고 이 법전이 1833년까지 러시아 법의 기초가 되었다. 이 법전은 교회를 국가의 관할하에 두고 농노제를 법제화했으며, 군주에 대항하는 '언행'죄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정치적으로 17세기에는 폴란드와 수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동(東)우크라이나를 병합했다. 한편 1650년대에는 총대주교 니콘이 전례를 간소화하고 그리스어 원전과는 너무 달라진 교회 서적을 바로잡았으며, 성직자의 사목기능을 강조하는 등 종교적인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자 러시아 정교회 내에 분열이 생겼으며, 각 교파와 지역에서는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정부는 개혁가 편에 서서 '복고신앙파'를 억압했다.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치세(1689∼1725)

17세기말의 중요한 사건은 대제 표트르 1세의 등극(1689)이었다. 표트르 대제의 등극은 그후 2세기 동안 러시아를 지배하게 될 사회적·제도적·지적 동향을 예고하고 확립하는 사건이었다. 표트르는 소년 시절에 모스크바에 살던 서유럽인들과 아주 가까이 지냈다. 이러한 교제는 그에게 항해나 기계기술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는데, 그런 교제가 없었다면 그는 사회적으로 자유롭고 지적으로 자극적인 분위기를 체험할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런 활기차고 '개방적인' 생활방식을 러시아에 도입하기로 했다.

표트르는 러시아 최초의 해군을 창설해 러시아의 남쪽 국경을 크림 타타르족의 약탈 위협으로부터 지키려고도 했지만, 그보다 스웨덴과의 대(大)북방전쟁(1700∼21)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색인 : 대북방전쟁). 표트르는 이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고 핀란드 만과 발트 해의 동쪽 유역을 손에 넣었다. 표트르는 스웨덴으로부터 획득한 땅에 인상적인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이 도시 건설에는 3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명 손실이 따랐으며 공사(公私)의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었다. 그렇게 건설된 새 수도는 러시아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서유럽 쪽으로 옮겨갔음을 상징했다. 1721년 이후 표트르 대제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제국의 남쪽 국경을 카스피 해 연안까지 확장했다.

표트르는 공식적으로 모스크바 공국의 차르 체제를 바꾸어 러시아 제국을 선포했으며 그 자신은 1721년 스웨덴과의 강화조약 체결 때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개인적 역할보다는 공적인 기능을 강조하고 근대적인 행정 체계의 기초를 마련했다. 새로운 행정부에서는 업무성과가 임용과 승진을 위한 주된 기준이 되어야 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표트르는 1722년에 공무원 '관등표'를 마련했는데 이 관등표는 19세기 후반까지 군사·행정·사법 분야에서 모든 국가공무원의 공직활동을 위한 기틀을 이루었다. 이 관등표에서는 공무원의 위계를 14개 등급으로 나누어 이론상으로 공무원은 누구나 최하위직(14급)에서 출발해 점수와 연공서열에 따라 승진하도록 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관등표는 모든 공직을 점수제로 하여 개방함으로써 공직을 민주화한 셈이었으나 공무를 맡자면 충분한 준비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에 공무원이 될 수 있는 사람은 18세기 후반까지 귀족과 성직자들로 한정되었다.

자격을 갖춘 사람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관등표를 만들어내게 했듯이 바로 그 필요성이 여러 사회 신분에 대한 표트르 대제의 정책을 결정하기도 했다. 표트르는 모든 신분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전통적으로 부담하고 있는 봉사 의무에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형식을 부여했다. 이 개혁은 전통적인 신분제도를 거의 벗어날 수 없는 폐쇄적인 집단 구성으로 변형시켰다. 이제 귀족은 평생 정규적으로 공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귀족에게 공직활동을 위한 예비교육을 받도록 규정함에 따라 가정이나 교육기관에서 받는 모든 수업은 귀족생활의 한 특징이 되었다.

농부는 농노가 되더라도 자기가 속해 있는 마을 공동체나 경작지와 예로부터 맺었던 연줄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탈세방지를 위해 표트르 대제는 '두샤'('영혼' 또는 '농노'를 뜻하는 말)라는 새로운 과세단위를 도입했다. 이 말은 노동 연령의 농노를 가리키는 말로, 각 농노에게 부과되는 세금의 징수 책임은 그들의 주인에게 맡겨졌다. 그러므로 농노는 주인의 필요와 기분에 따라 양도·매각 또는 교환될 수 있는 조세대장 상의 세목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농노는 사실상 노예와 다름이 없었다.

세속적인 전제군주가 대부분 그렇듯이 표트르 대제도 교회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총대주교가 1700년에 죽었을 때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고 결국 1721년에 이르러 교회에 하나의 관료기구를 만들었다. 이것이 여러 명의 임명직 대사제(大司祭)와 황제의 평신도 대표 1명으로 구성되는 '성의회'(Holy Synod)였다.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엄격히 세습되었으며, 사제단은 러시아에 도입되기 시작한 새로운 세속문화로부터 단절되고 전통적으로 지니던 도덕적 권위를 박탈당한 채 정부의 종교적 공복이라는 폐쇄된 신분집단으로 변모했다.

표트르 대제의 재위기간이 러시아 역사에서 최고의 발아기(發芽期)였던 것은 행정개혁과 군사적 정복 활동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최소한 공직 귀족층에서 나타난 제국의 문화와 생활양식의 변화를 꾀했다는 점에 있다. 외국인들은 표트르 대제가 귀족들에게 수염을 깎고 서유럽식 의복을 입고 댄스와 파티에 참석하며 커피 마시는 습관을 들이도록 한 조치를 중시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한 세대 남짓 만에 러시아의 교육받은 귀족을 유럽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만든 더 깊은 변화의 외관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표트르 1세의 치세가 러시아의 교육과 문화생활에서 새 시대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표트르 대제는 처음으로 세속 교육을 대폭 도입하여 모든 국가공무원에게 의무적으로 교육받도록 했다.

당대인이나 후대인이나 다 같이 표트르의 치세는 혁명적이며 가장 큰 업적은 발트 해 연안지방과 카스피 해 주변지방의 정복이라는 점에 동감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재위중에 러시아가 상업 대국들과 정기적인 교역을 갖는 유럽 열강 대열에 끼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표트르 대제의 치세가 러시아의 과거와 완전 결별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17세기의 조류가 절정에 달한 데 불과한 것이었느냐는 아직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시기가 러시아의 역사에서 항상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표트르 대제의 후계자들(1725∼62)

1725년 표트르가 52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자 제도상 2가지 문제가 중요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 첫째는 왕위계승문제였는데, 표트르가 자신의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이후 18세기말까지 대부분의 유력한 개인이나 집단은 전임 통치자의 선택을 무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둘째는 제국의 정책에 관한 확고하고 중심적인 지시·계획·통제의 결여였으며, 이와 밀접하게 관련해 정책의 입안에서 누가 결정적인 역할을 맡느냐는 문제(즉 '통치집단'의 성격과 그것이 전제군주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는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 해결에 실패하자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돌고 잇따른 위기 상황이 겹쳤다. 1725년부터 1762년 예카테리나 여제가 등극할 때까지의 기간은 통일성과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다.

중심적인 통치집단의 결여는 정부가 빈번히 황제의 총신이나 척신에 의해 운영되는 결과를 빚었다. 이들 가운데 다수가 독일계여서 러시아인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표트르 대제 사후의 이 기간은 표트르가 재위 당시 실시한 행정개혁이 결실을 맺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관등표 국가를 위해 일생을 바치는 공직자 계층을 위한 틀이 되었다. 원칙적으로 공무원이 될 기회는 사제들과 비(非)러시아계 지주의 자제를 포함하여 소정의 능력과 교육 조건을 갖춘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개방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관등표에 따른 승진은 해당자의 점수와 업적이 황제에 의해서, 또는 더 정확하게는 황제와 가까이할 수 있는 고위공무원과 고위성직자들에 의해 인정받는 경우에만 가능했다. 이러한 개인적인 요소가 공식 승진제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정부와 군대의 위계에서 최상층 집단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 집단이 구성원을 결정하고 자기들과 가장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가문의 이익을 도모하면서 거의 항구적인 지배계급을 구축했다. 이 체제는 통치자의 능력 부족과 총신들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표트르의 개혁을 공고히 하고 외교정책에서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며 국력과 부를 전체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충분히 기여했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치세(1762∼96)

1762년에는 궁정 쿠데타로 표트르의 가장 걸출한 후계자가 제위에 올랐다. 예카테리나는 독일의 한 가난한 군주의 딸로 태어나 15세 때 러시아 왕정의 후계자 표트르 3세의 신부가 되기 위해 러시아로 왔다. 그녀는 음모와 권력투쟁이 난무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남편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서 인기를 얻지 못한 사람이었으며 친(親)프로이센 정책을 펼쳐 많은 원한을 샀다. 그러므로 예카테리나가 원로원과 고위 관리들, 그리고 그녀의 애인 그리고리 오를로프와 그의 형제들이 이끄는 황실 근위대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표트르 3세를 타도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예카테리나의 재위기간에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상당히 확장되었다. 그녀는 폴란드 분할에 가담하여 동부 폴란드 전체와 옛 리투아니아 대공령을 러시아 영토로 편입했다. 남쪽으로는 흑해의 북쪽 연안과 크림 반도를 획득했고 스텝 지대에서는 우랄 산맥 너머와 카스피 해 연안까지 확장했다. 이에 따라 남부에서는 식민화와 농민의 재정착이 대규모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오데사를 포함하여 남부의 많은 중요한 도시가 발달했다. 이 신흥개발지의 토지소유권이 러시아 귀족에게 무더기로 넘어감으로써 이 일대에까지 농노제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농노제 확대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농민들의 빈궁과 착취를 가중시켰고, 농민의 빈궁은 1773∼74년에 카자크인 예멜리얀 푸가초프가 이끈 유럽 러시아 전체를 휩쓴 반란으로 폭발했다. 농민반란은 도처에서 승전고를 울렸지만, 결국 정부군에게 진압당했다.

푸가초프의 반란은 지방관리의 허점을 드러내 여러 가지 지방행정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제국은 각각 지사의 감독을 받는 다수의 현(縣: 그베르니야)으로 나뉘었다. 이 새로운 제도는 일부 행정업무를 위임받은 적극적이고 개화된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불어넣어 주었으나 농노와 하층민들은 자기들의 권익을 보호해줄 자가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중앙정부 운영에 아무런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않았으므로 표트르 체제의 큰 제도적인 결함(즉 행정관할 사이의 분쟁을 조정·해소하며 정책을 입안하고 그 이행을 감독할 기관이 없다는 결함)은 그대로 남았다. 그녀는 1649년부터 시행되어온 법전의 개정을 위해 농노를 제외한 모든 계층이 참여해 선출한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했다. 예카테리나는 서유럽 정치사상가의 영향이 크게 반영된 지침서를 직접 작성했지만 그것은 합리적인 법전을 위한 청사진을 마련한다는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고, 전제군주제와 강력한 중앙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위원회는 1768년에 해산되었다.

예카테리나의 사회정책은 귀족이 공직에 매이는 것을 줄이고 문화적·경제적 활동을 적극 펴나가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의 실현을 위해 그녀는 귀족들에게 소유지의 지표자원과 지하자원을 개발·이용하고, 부동산과 농노의 노동력에 의한 산물을 독점시판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귀족들은 또한 거주민이 있는 토지의 소유권을 독점함에 따라 농노의 소유권이 사실상 귀족계층에 한정되었다.

 

18세기 교육과 사회변화

교육 역시 공직승진을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개선되었다. 교회학교도 중요시되어 미래의 주교들을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급과 고위급의 행정부서 담당자 및 러시아 최초의 토박이 교수·고전학자·자연과학자를 배출했다. 여러 가지 지적 사조가 결합하여, 교육받은 러시아인들에게 국민적 자부심과 러시아가 문화적·정치적으로 유럽의 강대국 대열에 올라 있다는 긍지를 갖게 했다. 그러나 정부가 이러한 조류를 항상 좋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1790년 알렉산드르 라디시체프가 출판한 <상트페테프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여행>은 농노의 비인간화와 그 주인들의 부패상을 기술하고 이러한 것들이 기존질서의 안정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국가적 존속도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책의 내용에 격분한 예카테리나는 라디시체프를 체포하여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냈다. 그는 러시아의 엘리트 가운데 최초의 정치적 순교자가 되었으며, 그의 책과 운명은 19세기 러시아 역사를 지배하게 될 인텔리겐치아와 정부 사이의 적대관계를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알렉산드르 1세부터 니콜라이 1세까지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

러시아는 19세기에 들어와 제국을 개혁하여 신민들을 이롭게 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차르 알렉산드르 1세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포부는 국민의 철저한 타성과 후진성 및 광대한 국토로 인해 좌절되었다. 실패의 더 큰 이유는 나폴레옹의 침략정책으로 알렉산드르의 관심이 외교와 국방에 쏠렸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풍부한 인력과 빈약한 재정자원이 전쟁으로 소모되었지만 나폴레옹이 1812년 원정에 실패한 결과 러시아는 유럽 최대의 육상 강국으로, 또 대륙 최초로 나폴레옹을 이긴 전승국으로 떠올랐다. 러시아가 이 전쟁에서 얻은 대단한 평판은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1815년 이후 알렉산드르는 국제평화를 위한 웅장한 계획에 주력했다. 그가 외교와 종교에 전념하는 동안 러시아는 군사적 승리를 발판으로 농노제를 포함한 기존질서의 유지에 힘쓰는 보수주의자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교육받은 청년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1820년대초에는 프리메이슨 지부를 포함한 비밀결사 움직임이 활발했다. 이 비밀결사는 정부를 타도하려는 모의를 했다.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로 알려진 이 모의자들은 알렉산드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1825년 12월에 거사하려고 했으나 실패해 체포되었으며, 그중 5명은 사형을 당하고 많은 사람이 징역형에 처해졌다. 알렉산드르의 후계자인 니콜라이 1세는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어떤 중대한 정치 변화도 단호히 반대했다. 1848년의 유럽 혁명 이후, 그는 모든 변화를 반대해 온건한 자유주의 사상까지도 의심하기에 이르렀고 반계몽주의적 검열을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반동은 절정에 달했다.

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 1세 치하의 러시아는 관료제로 운영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후임 군주들이 유럽식 행정체제를 수립하려던 노력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러시아 관료제는 1750년 중부 유럽에서 시행된 관료제의 몇 가지 특징과 표트르 이전 러시아 관료제의 몇 가지 특징이 결합된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절대다수의 공무원이 가지고 있는 '봉사 정신'의 기초는 차르에 대한 복종이었지, 유럽에서 인식되었던 국가에 대한 봉사라는 관념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관료들은 직급과 지위에 집착했는데, 이것이 정부가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동기였기 때문이다.

하급공무원은 미미한 존재였지만 그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봉급은 언제나 박봉이었다. 경제적 후진 상태, 귀족에 대한 비과세, 그리고 카프카스에서의 오랜 식민전쟁을 포함한 자잘한 전쟁과 대규모 전쟁에 투입되는 비용 등으로 정부는 빈궁했다. 정부관리의 낮은 교육수준도 심각한 문제였다. 책임이 중앙집중화되어 결정은 늦어졌고, 수년씩 지연되는 경우도 드물지않았다. 비교적 큰 집단을 이루는 유대인과 러시아 정교회 외의 그리스도교 종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핍박받고 있었고 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19세기 전반기에는 농노제 개선을 위한 어떤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빨리 이 제도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어떤 손쉬운 해결책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농노제를 철폐하자면 다른 제도가 그것을 대신해야 하는데, 기존의 관료기구는 무력했다. 대부분의 농노소유자들은 이 제도가 존속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며, 농노를 해방시키면 많은 사람이 경제적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농노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에 농노의 수는 러시아 총인구 약 7,000만 명 가운데 4,7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처럼 뚜렷한 내부 문제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러시아 제국은 특히 아시아에서 상당히 팽창했다. 카프카스 지방에서는 그루지야 왕국이 1801년 자진해서 러시아와 합병했으며, 그루지야의 다른 작은 공국들은 그후 몇 년 안에 정복되었다. 페르시아는 1813년 아제르바이잔의 북부를, 1828년에 아르메니아의 예레반 주를 할양했다. 1840년대에는 카자흐스탄의 유목민족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극동에서는 러시아 선박이 아무르 강 하류를 탐험하고 1849년 사할린과 아시아 본토 사이의 해협을 발견했다. 1799년에 설립한 러시아아메리카회사는 알래스카 연안과 섬들을 장악했다. 유럽에서는 1809년에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를 획득했다. 이러한 영토 획득으로 19세기 러시아는 다언어적이고 다종교적인 제국이 되었다. 전체 주민 가운데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 주민은 약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정교회 신자들은 다른 종파의 그리스도인들에 비해 어느 정도 특권을 누렸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교도들보다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이슬람교도들도 유대인들만큼 불리하지는 않았다. 종교적 믿음의 바탕을 이룬 것은 차르에 대한 순종이었다.

러시아의 지배에 대한 폴란드인의 불만은 19세기에 간헐적으로 폭발했다. 이 두 나라는 다같이 과거 리투아니아 대공령에 속했던 양국의 국경지방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했다. 1820년대 말엽 리투아니아를 차지하려던 폴란드의 기대가 무너지고 1830년 11월에 바르샤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에 긴장이 고조됐으며, 마침내 1831년 러시아와 폴란드는 전쟁에 들어갔다. 폴란드가 전쟁에 패해 폴란드의 헌법은 폐지되고 러시아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19세기 러시아는 투르크와도 중대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오랫동안 실시하던 대(對) 투르크 정책은 곡물을 수출할 흑해 연안의 창구를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외교와 무력을 통해 이 방면에서 많은 진전을 보았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러시아 함대에 대한 흑해 수역의 개방과 베사라비아(몰도바)의 합병이었다. 그러나 투르크 사태와 근동의 그리스도교도 상황에 대한 유럽의 우려가 크림 전쟁으로 연결되어 러시아는 영국·프랑스·투르크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카프카스 방면에서의 몇 차례 승전과 장기간의 세바스토폴 포위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결국 이 전쟁에서 패했고, 러시아군 최고사령부는 위신이 크게 떨어졌다.

 

알렉산드르 2세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

크림 전쟁의 패전으로 러시아의 후진성이 뚜렷이 드러나자 그후 추진된 현대화의 첫 단계가 농노제의 폐지였다. 1861년 농노들은 알렉산드르 2세(1855∼81 재위)에 의해 농노신분에서 해방되었으며, 자영농을 할 권리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절대로 농민들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개혁으로 가장 이득을 본 쪽은 농민도 지주도 아닌 국가였다. 이제는 국가의 행정이 선거로 이루어지는 최하 권력단위인 '오프시치나'를 중심으로 하는 마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소수이기는 해도 농노해방 뒤 수십 년 동안 일부 농민이 번영과 자립의 꿈을 키울 수가 있었다.

많은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었다고는 해도, 농업은 후진성을 면치 못했고 빈곤이 번영보다 빠르게 확산됐다. 한 가지 이유는 농업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정부의 경제정책은 국력과 군사력 강화에 대한 욕심으로 추진되었고 농업은 주로 공업과 군사력 육성을 위한 재원으로 간주되었다. 그밖에 인구과잉도 한몫을 해 가경지 단위와 수확량에 대한 농업인구 비율은 서유럽에 비해 극도로 높았다. 농민 공동체 미르의 비능률도 문제를 어렵게 하는 요인의 하나였다. 농민 지방자치체가 가족의 수요에 따라 소유지를 재분배하고 모든 구성원들에게 윤작을 지시할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권한 때문에 농민공동체는 진취적인 농부들을 좌절시키고 무능한 농부들을 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농노해방에 이어 다른 중요한 개혁도 시행되었다. 1864년에 새로운 현 단위와 군(郡) 단위의 민선의회제도가 도입되었다. 젬스트보로 불린 이 의회는 농민을 포함한 모든 계급에 의해 선출되었다. 젬스트보는 세금을 부과하고 자체 자금을 학교·병원·도로의 건설과 그밖의 사회복지시설에 쓸 수 있었다. 1870년에 유럽의 법을 기초로 하여 사법상의 개혁도 이루어졌으며, 러시아의 주요도시에 민선자치정부의 수립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개혁에도 혁명의 움직임은 점점 커져갔다. 많은 농노와 급진적인 지식인들은 농노들이 평생 동안 경작해왔던 토지를 돈을 주고 사도록 한 농노해방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또 진보파 귀족들은 일종의 국민적 대표기관과 자문기관 창설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혁명적인 집단 가운데는 사회주의 경향의 집단과 테러리즘 및 국가전복음모를 선호하는 집단도 있었다. 1881년 농노를 해방시키고 그밖의 개혁을 시행했던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다.

그의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1881∼94 재위)는 여러 개혁작업을 계속해나갈 계획이었지만, 결국은 전제군주제의 원칙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재천명했다. 반동의 시기가 뒤따라 교육이 제한되고 젬스트보의 작업이 방해받고, 농민 공동체가 더욱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민선 치안판사직이 폐지되고 공무원들은 국민, 특히 빈민층을 오만한 태도로 경멸했다. 러시아 정교회교도가 아닌 그리스도교도와 유대인을 차별하는 법률은 여전히 광범한 부정과 부당한 대우와 원한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은 억압정책은 한동안 실효를 거두었지만, 그후 수십 년 동안에 이룩된 경제발전은 새로운 사회적 긴장을 조성하고 또다시 적극적인 반정부운동을 벌일 새로운 사회집단을 생겨나게 했다. 젬스트보와 중앙정부의 마찰이 잦아지고 젬스트보의 사회개선 노력은 비정치적인 성격의 것까지 방해를 받았다. 1890년대 말엽, 국가자문회의의 설립을 추진하는 온건 자유주의가 지주 출신 중심의 민선 젬스트보 의원들 사이에 강력히 대두되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더욱 급진적인 태도는 도시의 전문 직업층에서 볼 수 있었다. 공장노동자계급의 성장은 대대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고, 19세기 말엽이 되자 정치에 대한 관심은 농민층에까지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사회혁명가들은 러시아에서 증대되고 있는 인텔리겐치아들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정치·사회 제도를 용납하지 못하는 교육수준이 높은 시민들이었다. 19세기 말엽 젊은 혁명가 대다수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나 종파에 관련된 사람의 자제들이었다. 그들에게 차르의 전제군주제는 가증스러운 것이었으나 전제군주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덕망있는 전제군주를 꿈꾸고 있었다.

19세기말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는 농민공동체를 기초로 한 사회주의 질서 수립에 뜻을 둔 사회혁명당과 러시아의 장래가 공업화와 노동자계급에 있다고 믿는 사회민주노동당의 2대 주류로 나뉘어 있었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다시 레닌의 본셰비키와 후에 멘셰비키파로 알려진 집단 등과 그밖의 많은 집단으로 나뉘었다. 멘셰비키가 서유럽식의 대규모 노동운동을 일으키는 데 목표를 둔 반면 레닌은 엄격한 규율을 중시했으며, 멘셰비키는 볼셰비키보다 비사회주의적인 자유주의자와 협력하는 데 훨씬 더 적극적이었고, 레닌이 멘셰비키보다 잠재적 혁명세력으로서의 농민들에게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등의 견해는 일리는 있지만 지나친 단순화이다.

19세기말 러시아의 교육발전은 인구성장에 미치지 못했다. 그때까지 대학교 졸업자나 재학생은 전인구를 통틀어 0.1%에도 못미쳤다. 이들 대부분은 귀족이나 공무원의 자제였다. 당시 학령아동 가운데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는 1/3이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교육을 무시하는 풍조를 더이상 단순한 후진성이나 자금부족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통치자들이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근대적인 학교제도를 수립할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는 러시아가 문화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한 세기였다. 이 시대 러시아 문학에는 푸슈킨, 레르몬토프, 고골리,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거장들이 등장했으며, 글린카, 발라키레프,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차이코프스키 등 걸출한 작곡가들이 활약했다. 유명한 과학자 중에는 로모노소프(18세기), 멘델레예프, 파블로프가 있다.

국내 문제와 개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19세기 후반 중에 아시아로 극적인 팽창을 계속했다. 1860년에 러시아는 아무르 강 남쪽의 좁고 긴 태평양 연안지방을 획득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875년에는 사할린 전체를 차지했고 같은 기간에 투르키스탄과 투르크멘을 차례로 정복했다. 극동에서는 19세기말 러시아가 중국의 국익을 옹호하고 그 대가로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합병함으로써 일본과의 관계가 긴장되었다. 러시아는 뤼순 항[旅順港]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만주에 러시아 소유의 철도 부설권을 확보했다. 니콜라이 2세(1894∼1917 재위)가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부정해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고, 일본은 1904년 2월 8∼9일 밤에 러시아 해군이 주둔한 뤼순 항을 기습공격했다.

 

차르 체제 말기

러일전쟁(1904∼05)을 기점으로 러시아의 차르 체제는 종말로 접어들었다. 전쟁에서 입은 결정적인 패배에다 차르 체제에 대한 반란과 혁명이 겹쳐 러시아는 중대한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정치적 불만은 전쟁 기간 내내 고조되었으며, 도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경제상황은 악화되었다. 1905년 1월 22일(구력 1. 9) 일요일에 노동자들의 큰 무리가 그레고리 가폰이라는 한 사제의 인솔하에 동궁(冬宮) 앞 광장으로 행진했다. 군인들의 발포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거나 중경상을 입었다. '피의 일요일'에 뒤이어 일어난 혼란은 갈수록 심해졌다. 파업, 노동자 시위, 가두투쟁, 농민반란, 그리고 육군과 해군의 폭동이 잇달아 일어났다. 사태는 비러시아계 주민들의 거주지역에서 특히 심각했다. 1905년의 혁명운동은 10월에 절정에 달해 전국적인 철도노동자 파업이 일어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자 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 붕괴의 위협에 직면한 니콜라이 2세는 국민의회 소집을 약속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후 몇 주 동안에 두마로 불리는 의회의 권한을 규정한 법률과 의원선출을 위한 절차가 잇달아 발표되었다.

1906년 선거에 의해 구성된 제1차 두마에서는 좌파 의원이 다수를 차지했다. 비러시아계도 대표로 진출했지만, 러시아의 보수세력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두마와 차르의 장관들이 협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두마가 요구하는 개혁안, 즉 지주의 소유지를 보상에 관계없이 농민들에게 재분배하고 정치범들을 사면하여 유대인과 비국교도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주고 폴란드에 자치를 허용한다는 것은 정부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들이었다. 교착상태가 2개월간 계속된 후 차르는 두마를 해산했고 새로 총리에 임명된 표트르 스톨리핀은 차르의 특령으로 다스렸다. 농민폭동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1907년초에는 혁명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고 군대의 규율이 회복되었으며 경찰은 효과적으로 기능을 수행했다. 1907년에 제2차 두마가 선출되었지만 몇 개월 후에 다시 해산되었다. 이 2번째의 해산 후에 선거법이 개정되어 투표권은 상류계층에는 유리하고 농민들에게 불리하도록, 그리고 러시아인에게는 유리하고 타민족에게는 불리하도록 제한되었다.

1904∼17년에 두마는 2번 더 소집되지만, 차르의 정부는 19세기의 전제군주식 과거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생활에는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정당들이 대중집회를 열고 공공연히 정치토론을 벌였고 언론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파업이 불법으로 규정되기는 했지만 노동자들의 노조결성권은 인정되었다. 중앙정부는 더이상 지방자치정부를 방해하지 않았다. 초등교육은 양과 질에서 모두 향상되고 있었다. 여러 여건과 전망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교육받은 남녀는 여전히 많은 일에 분개했고, 인텔리겐치아와 정부의 적대관계가 완화된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질서회복 외에 스톨리핀의 주된 관심사는 농업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가 농업에 투자해야 하며 다른 경제부문들을 육성하기 위한 착취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농민공동체 미르의 해체와 개인농장 설치를 촉진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스톨리핀의 개혁작업은 1911년에 그가 암살당하고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중단되었다. 그의 사후에 정부는 음모를 일삼는 관료와 아첨꾼들로 둘러싸인 나약하고 결단성 없는 차르 중심의 옛날 정부로 되돌아갔다. 이 시기에 종교적 협잡꾼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황후의 외아들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일종의 최면으로 진정시킴으로써 황후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14년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데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 일어난 전쟁의 물결이 러시아로 밀려왔다. 이 물결은 복잡한 동맹관계를 만든 19세기 유럽의 경향과, 발칸 반도에 사는 슬라브족에 대한 처우를 둘러싸고 러시아가 투르크에 대해 품은 뿌리깊은 적대감 때문에 더욱 거세졌다. 러시아의 정책은 1908∼09년 보스니아 위기 때 러시아가 독일에게 공개적으로 수모를 당하고 세르비아에 대한 지지를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르자 발칸 문제로 발전했고 그후 몇 년 동안 러시아 외교는 투르크를 포함한 발칸 여러 나라의 반(反)오스트리아 세력을 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 노력은 실패로 끝났지만, 1912년에 결성된 투르크에 대립하는 세르비아-그리스-불가리아 동맹은 러시아로서는 하나의 성공이었다. 1913년의 제2차 발칸 전쟁은 불가리아를 다시 오스트리아 진영에 가담하게 했다. 오스트리아가 1914년 여름 세르비아에 내놓은 요구조건은 러시아를 진퇴양난에 빠지게 했다. 세르비아를 포기하면 러시아는 발칸 반도 전체를 상실하고 프랑스의 동맹국으로서 가치를 의심받게 될 것이며, 그럴 경우 러시아는 독일의 위성국으로 전락할 위험마저 있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가 취할 수 있는 대안은 발칸 반도의 분쟁을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1914년 당시 러시아의 입장으로서는 제2안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결정은 제정 러시아 체제가 붕괴하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1914년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은 가치있는 것이었다. 러시아군의 동부전선 진격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프랑스에 신속하게 승리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동프로이센 침략은 거의 15만 명에 달하는 포로를 내준 채 실패로 끝났다. 투르크가 독일의 동맹국으로서 참전한 것은 러시아에게 큰 타격이었다. 투르크의 참전으로 카프카스 방면에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 해협이 봉쇄됨으로써 연합국이 러시아로 보내는 보급물량이 엄청나게 줄었고 러시아군은 심각한 군수품 부족에 시달렸다. 1915년 5월, 동맹국들은 폴란드에서 공세를 개시해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가을까지 러시아는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이러한 재난은 국내에서 대단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두마에서도 언론에서도 '국민의 신망을 받는 당당한 정부'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는데 차르는 이 요구를 묵살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겠다고 고집하고, 정부다운 정부를 구성할 수 없을 무능한 장관들을 뽑아 수도에 남겨놓았다. 경제사정은 악화되었다. 병력 동원으로 말미암아 공업도 농업도 혼란에 빠졌고, 수송기관은 적재과잉으로 삐걱거렸으며, 군당국은 민간업무에 임의로 간섭했다. 물가상승은 임금인상을 훨씬 앞질렀으며, 물자부족현상에 식량난까지 겹치는 심각한 상태로 치달아 노동자계급의 불만은 쌓여갔다.

1916년에 들어와 전세는 호전되었지만 여론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중앙정부의 관료들은 젬스트보나 지방자치체들과 불필요하게 싸웠다. 차르의 장관들은 대단히 무능하고 인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1916년 12월에 라스푸친이 피살되어 황제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1917년 1월에는 수도의 식량난이 한층 악화되었다. 3월초에는 파업과 시위와 식량 배급 행렬과 정처없는 군중이 거리를 메웠다. 몇몇 병영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군대는 군중편이어서 군중에게 발포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페트로그라드로 개칭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대표가 결성되고, 차르가 정회처분했던 두마도 상임위원회를 설치했다. 소비에트와 두마 위원회의 협정으로 구성된 임시정부의 사절단이, 차르가 군사령부로부터 돌아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머물러 있던 프스코프에 도착했다. 차르는 그들에게 퇴위의 뜻을 전했다. 러시아 천년왕국이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제정 이후의 러시아

임시정부는 어렵고 말썽 많은 여러 문제에 부딪쳤다. 식량난과 악화되는 경제위기는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어려운 일들을 안고 있는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은 괴로운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무엇보다 군주제를 전복한 혁명적인 상황에서 좌절당한 각계각층의 국민이 품고 있던 불평과 요구사항들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의 정치풍조는 한층 더 과격해지고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요구, 노동자들의 식량과 공장 경영에 대한 요구, 병사들의 독립 요구는 더욱 집요해졌다.

2월혁명이 일어날 당시 레닌은 스위스에 체류하고 있었고, 트로츠키는 뉴욕에, 스탈린은 시베리아에 있었다. 볼셰비키는 소수였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레닌은 임시정부를 공공연히 비난하며 독일·스웨덴·핀란드를 거쳐 페트로그라드로 가는 여권을 입수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넘길 것'을 선언했다. 그는 신속하게 볼셰비키의 방향을 잡고, 갈수록 과격해지는 러시아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조직과 선전활동을 벌였다.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을 잠식하면서 급속도로 대중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그결과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 대의원들이 늘어났다.

 

10월(11월)혁명

8월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총리에 대한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의 역쿠데타 준비소식이 알려지자 임시정부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급속도로 와해되었다. 대중적인 혁명의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뛰어오르는 물가와 심화되는 물자난의 자극을 받아 직접 행동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농민은 지주의 재산을 압류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파업은 확산되고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관리'를 강행하기 시작했다. 키예프와 헬싱키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와 핀란드를 사실상 독립시켰다. 농민출신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토지점령에 한몫 끼기 위해 대대적으로 탈영함으로써 군대는 무너져갔다. 도시의 예비부대는 전방으로 파병될 것이 두려워 볼셰비키의 수중 깊숙이 들어왔다. 이와 같이 혼란이 더해가는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가장 극단적인 민중의 요구를 선뜻 들어주는 유일한 정당이었다. 그들은 소비에트에서 연이어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고, 9월 중순에는 핵심 소비에트인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를 장악했다.

레닌은 이 시점에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임시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공공연히 촉구했다. 임시정부가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자 혁명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페트로그라드를 독일측에 넘기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같은 혼란상태를 이용하여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설득, 자체의 병사혁명위원회가 수비대에 대한 비상통수권을 장악하도록 했다. 소비에트의 수비대 통수권 주장에 화가 난 임시정부는 11월 6일(구력 10. 24) 아침에 군대를 보내 볼셰비키의 신문사를 폐쇄했다. 볼셰비키는 이것을 반혁명 쿠데타의 개시로 보았다. 그들은 소비에트를 지키기 위해 그들에게 동조하는 군대와 노동자 적위대(赤衛隊)를 출동시켰으나, 동원할 수 있는 정부군은 거의 없었다. 저녁 무렵 페트로그라드 시 대부분을 장악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공공시설과 정부청사를 신중히 인수하기 시작했다. 11월 7일 아침에는 임시정부 타도를 선언했다. 그리고 그날 밤 동궁을 사실상 유혈충돌 없이 포위하고 각료들을 체포했다. 볼셰비키의 승리는 우수한 조직, 교묘한 군중심리 조종, 레닌의 시종일관된 통솔방침이라는 요소가 잘 조화된 결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들의 성공은 오히려 정부측의 내부분쟁과 실수에 힘입은 행운이었고 기권승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소비에트 정부는 지체없이 혁명 의지를 선포하고 전면적인 개혁령을 잇따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사유재산제 폐지, 경작농민에 대한 토지분배, 은행 국유화, 교회와 국가의 분리, 남녀평등권 확립, 계급적 특권 폐지 등이 이루어졌다. 또한 법원과 경찰은 혁명재판소와 노동자 의용대로 대체되었으며 다른 정당과 무장세력은 진압되었고, 달력이 서양식으로 개정되었다. 한편으로 소비에트 정부는 독일 등의 동맹국측에 휴전을 제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해 독일과의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이 조약에 따라 발트 해 연안지방, 폴란드·우크라이나·핀란드·카프카스 지방을 독일과 오스트리아, 투르크에 할양해야 했다. 레닌은 러시아의 인구와 경제적 자원의 큰 부분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숨돌릴 여유'를 얻은 것이다.

 

내전과 전시공산주의

그로부터 소비에트 정부의 기반을 다지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비교적 평화로웠던 시절은 1918년 5월 내전이 일어나면서 막을 내렸다. 전투는 치열했고 외국의 간섭도 있었지만 백군(白軍), 즉 반소비에트군의 대의명분은 그들의 권위주의적인 경향, 농민의 토지소유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세, 그리고 비러시아계 소수민족에 대한(특히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처우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약화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국내 통신을 장악하고 외국의 간섭에 대한 국민적 저항정신을 배경으로 한 강점이 있었다. 승리를 거듭하는 동안 적군(赤軍)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상실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재점령했다. 동맹국의 후원으로 독립이 수립된 우크라이나·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에서는 그곳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고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을 구성하고 조약에 따라 러시아와 결탁했다.

내전으로 인한 격정과 절망의 감정은 공산주의 체제를 폭력주의의 일당독재정부로 급속히 변모시켰다. 야당 탄압과 병행해 공산당 내에서도 갈수록 독재적인 관행이 늘어났다. 당은 내부조직을 급속도로 강화하고 레닌의 민주적 중앙집중제의 원리, 즉 당의 결정에 모든 당원은 철저히 순종해야 하며 당의 고위기관의 결정은 지방조직들을 자동적으로 구속한다는 원리를 채택했다.

1918년에 내전이 시작되고 일당독재 체제가 출현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10월혁명 이래 경제와 사회문제에서 채택했던 비교적 점진적인 해결방안을 포기했다. 1918년 6월 대규모 공장을 전면 국유화한 것을 신호탄으로 러시아 사회를 곧바로 계급없는 공산주의의 이상사회로 바꾸려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경제사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1921년에 이르러서는 공산당 밖에서만이 아니라 당내에서까지도 반대여론이 들끓는 위기 속에 전시공산주의로 알려진 실험은 실패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업은 정체상태에 빠졌고 농촌은 식량징발을 둘러싼 소요로 들끓고 있었다. 파업은 불법이었지만 여러 대도시에서 빈발했다. 1921년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에서 일어난 수병들의 반란은 레닌과 공산당으로 하여금 전시공산주의의 종식을 선언하고 혁명의 전략적 후퇴로 신경제정책을 채택하게 했다.

 

신경제정책

레닌은 신경제정책(Novaya Eko-nomicheakaya Politika/NEP)을 표현하기를 당분간 달성할 수 없는 공산주의의 목표로부터 국가자본주의로의 후퇴라고 했다. 화폐제도와 시장경제가 복구되었고 농민들은 납세의무를 다한 뒤 생산물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무역과 많은 소규모 공업이 비국유화됨으로써 '신경제정책인'(Nepmen)이라는 새로운 소기업가 계급이 생겨났다. 대규모 공장·수송기관·공익기업·금융기관, 그리고 주요천연자원은 그대로 국가 소유였다.

신경제정책은 농업이나 공업 생산을 모두 신속히 회복시켰지만, 장래의 개발방식을 둘러싼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레닌은 당내의 이상에 치우친 감상주의를 엄히 단속했으며,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당 사무국원들은 요시프 스탈린의 영향을 받아 규율을 중시하는 집단으로 대체되었다. 당원의 숙청이 뒤따르고 스탈린은 1922년 4월 서기장직에 취임했다. 5월에 레닌이 첫번째 뇌출혈로 자리에 눕자 스탈린의 지위는 극적으로 상승해갔다. 1922년 12월 스탈린은 비러시아계 공화국들을 강요하여 러시아 공화국과의 공식적인 연방구성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소비에트 연방을 수립했다. 1929년까지 스탈린의 정적들은 당직과 관료직을 모두 박탈당했다. 스탈린의 최대 정적인 레프 트로츠키는 차르 시대의 방식대로 중앙아시아로 유배되었고, 1년 후에는 소련에서 추방당했다.

 

스탈린 시대(1928∼53)

1928년 이후 스탈린은 소련의 모든 생활 부문을 당이 통제하게 하고 그러한 통제권을 이용해 전국을 유례없이 격렬한 경제변혁으로 몰고갔다. 중앙계획경제, 특히 그중에서도 정부의 투자를 통한 계획 공업 개발은 스탈린이 새로 창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제1차 5개년계획은 신중하고 과학적인 입안이 없이 채택한 정치적 처방전이었다. 그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소련 경제를 훨씬 더 강력히 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조합과 마찬가지로 공장 지배인들도 그들의 자율권을 대부분 상실했으며, 신경제정책 기간중에 민간인의 수중에 있던 모든 소규모 공장이 다시 국유화되어 중앙계획체제하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계획이 소련을 1류 공업국으로 변모시키고 현대전을 벌일 수 있는 과학기술상의 토대를 닦아놓기는 했지만, 소비재와 농업은 타격을 입었다. 공업화운동이 전국적으로 급속한 도시화를 촉진하는 동안 주택 사정은 악화되었고, 그것은 그후 줄곧 소련의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다.

농민들을 집단농장에 강제로 이주시킨 것은, 스탈린 혁명에서 공업화의 기반을 이룬 경제적 토대를 건설한 첫번째 업적과 밀접하게 관련된 2번째의 큰 업적이었다. 강제에 의해 가속화된 공업화와 마찬가지로 강제적인 집단화도 스탈린이 정치적 수단으로 구상한 것이지만, 이는 잉여농산물 확보의 필요성을 충족시켰고 스탈린 정권의 항구적인 공약사업이 되었다. 스탈린의 계획은 농민들의 토지·농기구·가축의 완전한 사회자본화를 요구했다. 이러한 집단화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광범위하게 펼쳐졌는데, 그 뒤를 이은 소극적 저항 가운데 중요한 사건은 가축을 집단농장에 넘겨주기보다는 도살하거나 소비하는 사례였다. 저항이 가장 심했던 곳은 주요 잉여곡물 생산지역(우크라이나, 볼가 강 유역, 북카프카스 지방)이었다.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은 '계급 타파'를 당했다. 즉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송된 것이다. 정확하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강제이송 도중에 또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수백만 명의 인명손실이 생겼다. 1936년까지 사실상 100%의 농가가 어떤 형태로든 집단농장에 속하게 되었다. 1932∼33년의 극심한 한발과 기근은 집단화로 야기된 피해를 더욱 심화시키고 수백만 명의 새로운 인명손실을 가져왔다.

스탈린 혁명에서 공업화와 집단화에 이은 3번째의 큰 작업은 국민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실시한 전체주의적 규격화였다. 스탈린 혁명기간의 사회상은 무엇보다도 집단 조직에 대한 개인의 종속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1929년까지만 해도 공산당의 권력은 소련의 지적 생활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철학자와 역사가에 대한 탄압에서 시작하여 학문과 예술의 모든 분야가 극단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지령과 엄격한 당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당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사상가와 예술가의 입은 봉해졌으며, 투옥되는 경우도 많았다. 기술이나 선전으로 생산에 즉각 기여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스탈린의 이상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예술이란 대중에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격려조이면서 낙관적이며 그 형식은 전통적이어야 했다. 그밖의 것은 무엇이든 '부르주아 형식주의'로 여겨져 금지되었다.

1934년에는 스탈린이 추구한 사회의 기본 골격이 소련의 경제·정치 구조 안에 짜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은 심각한 긴장과 불안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집단화와 기근, 강제적인 공업화로 인한 폐해를 경험한 대중이나 새로이 심한 규격화를 당한 지식인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스탈린 방식이 혹독하다는 우려를 한번도 억누를 수 없었던 당내 관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탈린은 소련 정부와 산업체의 공산당원과 관리들을 중심으로 수백만 명을 체포·추방 또는 소탕하는 대숙청을 시작했다. 숙청의 도구로 이용된 '재판 공연'(1935∼38)으로 스탈린주의를 따르던 당내의 신구(新舊) 수뇌들이 극적으로 숙청되었다. 숙청은 러시아 외의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특히 심해, 사실상 당과 정부의 지도층 전원이 '부르주아적 민족주의'라는 혐의로 소탕되었다.

대숙청의 원인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방면의 몇몇 권위자는 주기적인 대량 숙청이야말로 전체주의적인 개인이 관료제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데 필연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비밀경찰기구가 한때 통제를 상실한 것으로 보아 그 숙청은 분명한 궤도이탈 현상이었다고 믿고 있다. 또다른 견해는 그 기간을 편집병적으로 의심하는 버릇이 있는 스탈린 개인의 정신병 발작기간으로 본다. 소련의 행정·산업·군대가 입은 피해를 보건대 그 숙청은 스탈린 독재정권에 이익보다는 피해를 준 무분별한 폭거였음이 분명한 것 같다. 그와 비슷한 규모의 큰 숙청은 그후 두번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성질의 소규모 숙청은 계속되었으며, 1940년대말에 특히 심했다. 스탈린은 숙청작업에 착수함과 동시에 정부의 민주적 외양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로서, 1936년 스탈린 헌법을 채택했다. 이 헌법에서 근로권을 비롯한 여러 경제권과 함께, 민주국가에서 전통적인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지명권을 손에 쥔 공산당의 권력독점과 어떤 반대 의견의 개진도 범죄행위로 취급하는 관례 때문에 이 헌법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격동의 1930년대가 끝날 무렵 소련 사회는 독일의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부닥쳤다. 히틀러의 군사력 강화와 유럽 점령계획은 자연히 스탈린을 불안하게 했다. 스탈린의 군사력은 아직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 만큼 위협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39년 8월 23일에 히틀러와 스탈린은 동유럽의 점령지 분할을 내용으로 하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히틀러가 마음을 바꿔 소련을 침략하기 전까지는 스탈린은 광대한 영토를 사실상 불로소득으로 얻은 셈이었다. 폴란드의 일부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로 흡수되었고 발트 해 연안국인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가 합병되었다. 핀란드가 침공을 받고 베사라비아가 점령되었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 침략을 개시하여 거의 무저항으로 쾌속 진군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스탈린은 침략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독일이 거둔 승전은 눈부셨다. 11월에 독일군은 모스크바 교외 지역을 돌파했으며, 키예프를 함락하고 레닌그라드의 성문 앞에 이르렀다. 우크라이나의 동부와 크림 반도의 대부분도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소련의 저항이 완강해졌다. 1943년초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전세의 전환점이 되었고 소련군은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해 1945년초에는 베를린에 도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소련 국민의 가혹한 희생을 강요했다. 약 1,500만∼2,0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죽거나 그만한 수의 사람이 불구·부상·영양실조 등에 시달렸다. 물자의 손실도 그에 못지않게 엄청났다. 공식적으로 6,790억 루블로 추산되는 손실은 대대적인 재건작업을 해야 할 만큼 광대한 규모의 파괴를 가져왔다. 그러한 고난을 견딘 소련 인민의 정신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소련 정부가 끌어낼 수 있었던 애국적인 희생정신이 축적된 것이 정부가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소련은 자국이 독일에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세계 2대 초강대국이라는 지위를 차지할 자격이 있음을 정당하게 주장했다.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 기간에 탈취했던 영토 외에 이제 동프로이센의 일부와 서부 우크라이나, 카르파티아우크라이나 지방,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양도받은 극동의 몇몇 변경 식민지가 추가되었다. 소련은 독일과 폴란드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 동부를 거쳐 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까지 점령했다.

전후의 재건 기간에 스탈린 숭배는 절정에 달했다. 이론상으로는 당이 국가를 통치했지만, 실제로는 스탈린이 당을 통치하고, 당을 통해 그밖의 소련 생활 모든 부문을 지배했다. 그의 동료들은 관리노릇을 하는 충실한 부하였다. 1939∼52년에는 전당대회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으며, 중앙위원회도 별로 소집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스탈린의 통치방식은 동유럽 공산국가의 지도자들에게도 강요되었다. 전후 몇 년 동안에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알바니아·불가리아가 모두 스탈린의 뜻을 추종하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바뀌었고 그와 거의 동시에 동서간의 냉전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이 후임자들에게 넘겨준 유산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인상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이루어진 영토확장과 동유럽에 대한 통제강화는 소련이 세계적인 강국임을 입증했다. 스탈린이 시작한 공업화운동은 소련을 중공업과 군사력에서 미국에 버금가는 나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탈린은 초·중등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공학자·기술자·과학자 양성을 강력히 추진했으며, 생산과정에 필수적인 기술 개발을 보상하기 위해 장려제도를 개편했고, 소련 사회에서 새로운 산업 엘리트가 큰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희생이 따랐으며, 그 값은 수백만 명이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지거나 대량 숙청으로 죽은 것, 식량·소비재·주택의 만성적인 부족으로 측정될 수 있었다.

스탈린은 그의 후계자들이 고심해야 할 억압당한 염원을 유산으로 남겼다. 첫째, 생활수준의 개선을 바라는 욕구가 간절했다. 둘째, 보다 나은 신변의 안전에 대한 염원이 그에 못지않게 널리 퍼져 있었다. 그것은 곧 언제일지도 이유도 모른 채 체포되거나 경찰의 감시를 받고 동료들에게 고발당하며 또는 언제 강제 노동에 끌려 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상태에서 해방되어 장래를 안전하게 설계하며 사는 삶에 대한 갈구였다. 셋째, 보다 큰 자유, 특히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타고난 재주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이는 특히 소련의 새로운 인텔리겐치아의 절실한 염원이었다.

 

흐루시초프 시대(1953∼64)

스탈린이 죽은 지 3년이 지난 1956년 공산당 제1서기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을 비난하는 그의 유명한 비밀연설로 탈(脫) 스탈린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그의 폭력적인 만행을 규탄함으로써 결국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시대의 만행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임을 직접 확언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변화도 있었다. 레닌이 공식화하고 스탈린이 자주 복창했던 교리, 즉 이른바 제국주의국가와 소련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선언은 이제 수정되어, 전쟁이 '숙명적으로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로 바뀌었다. 이 새로운 공식은 여느 때처럼 이 원칙이 일시적이라는 단서를 달지 않았으며 평화공존의 원칙을 재천명할 기초를 마련했다.

탈스탈린화 운동과 이데올로기의 재공식화는 공산주의 운동의 매력을 확산시키는 것과 동시에 흐루시초프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그로 인해 들끓게 된 소요는 그를 거의 파멸의 위기에 빠뜨렸다. 인텔리겐치아와 청년들 사이에서 고취된 저항 문학은 스탈린을 매도하는 단계를 넘어 소비에트 체제 자체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분야에서 일어난 혼란은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통제력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동유럽의 동요는 1956년 10월에 절정에 달했고 급기야 대규모의 소련군을 헝가리에 급파해 혁명을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헝가리에서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소련과의 싸움도 불사하도록 노동자들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폴란드에도 이와 비슷한 혁명 진압군 개입이 있을 뻔했으나 아슬아슬하게 모면했다.

당내에서는 흐루시초프 반대파가 늘고 있었지만, 제1서기장직의 고유권한을 발판으로 그는 당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튼튼히 했다. 이무렵 이미 그는 동유럽의 위기를 극복했으며, 동유럽의 권력구조는 안정된 듯 싶었다. 이제 세계는 로켓 분야에서 소련이 이룬 놀라운 업적을 지켜보게 되었다. 1957년 소련은 최초의 대륙간 탄도탄을 발사하고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다. 이러한 발전은 소련의 세계적 위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그 지도자의 권위를 높여 주었다. 그러나 미국과는 여전히 긴장상태에 있었다. 1959년 가을 흐루시초프는 양국의 긴장을 완화하고 미국의 양보를 얻으려는 기대를 걸고 미국을 방문했지만, 아무런 양보도 얻어내지 못했다. 1960년 5월에는 미국의 고공 정찰기 U-2기 1대가 소련의 깊숙한 영토 내에서 추락하고 조종사는 체포되었다. 이에 따라 그 달에 열리기로 예정되었던 파리 정상회담이 취소되었다. 미소 관계를 더욱 뚜렷이 악화시킨 것은 1960년대초의 콩고 내전과 1961년의 베를린 장벽 축조, 그리고 19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당장 두 강대국간의 전쟁을 촉발시킬 것 같았다 (→ 색인 : 무기 경쟁). 쿠바에 방어용 무기를 제공한다는 구실로 소련 정부가 쿠바에 중간급 중거리 미사일 발사대를 설치하려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정부가 해군 함정을 급파하여 쿠바를 봉쇄하고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시초프가 상호 서신을 교환한 끝에 흐루시초프가 '공격용' 무기를 철수하기로 동의함으로써 사태는 가까스로 수습되었다. 흐루시초프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가중되는 어려움에 부닥쳤다. 중소분쟁에는 공산권의 2대 강국인 중국과 소련이 서로의 입장이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르다는 사실이 그 근저에 깔려 있었다. 중국과 관련해 서방과의 전쟁에 말려들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흐루시초프는 중국이 원하는 핵무기 제공을 거부하고 중국의 대(對)중화민국 정책에 대해서만 형식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는 중국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여 무역과 군사·경제 원조를 감축하고 전문가들을 철수시켰으며 부채 상환을 요구했다.

이렇듯 국제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흐루시초프는 미국 및 서유럽과의 관계개선에 새로운 열의를 보였다 (→ 색인 : 해빙). 그는 1963년에 핵실험금지협정에 서명했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부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으며, 베를린의 긴장을 완화하고 서독과의 관계개선에 착수했다. '평화적 쟁점'을 장악하려는 흐루시초프의 결심에는 보다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서방과 긴장완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절실한 이유는 국내의 긴장과 재정 곤란이었다. 스탈린 이후 낮은 생활수준을 올려보려는 지도층의 노력은 국민의 욕구를 자극하기는 했지만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무기 생산과 중공업으로부터의 투자 전환이 요구되었지만,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농업과 공업 생산은 흐루시초프의 정책에 만족스럽게 부응하지 못했다. 당 지도부에서 많은 사람이 그의 투자 우선순위 변경을 반대한데다가 베를린과 쿠바 위기의 여파로 말미암아 그는 결국 권좌에서 축출당했다.

 

브레주네프 시대(1964∼82)

레오니트 브레주네프가 이끄는 소련의 새로운 지도층은 흐루시초프 시대의 지도층보다 훨씬 안정적이었으며, 집단지도체제가 새로이 강조되었다. 탈스탈린화 운동은 지식계층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지·역전되기까지 했다. 농업과 공업에서 다 같이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생산량은 목표에 훨씬 못 미쳤다. 우주 및 무기공학과 철강산업은 서방의 최고수준에 맞먹을 만큼 발달했으나 자동화·컴퓨터·석유화학과 같은 새로운 산업분야와 산업연구, 경영기술에서의 기술개발은 다른 공업국에 크게 뒤졌다. 브레주네프의 경제혁신책은 일부 사람의 갈채를 받았지만, 생산 실적은 경제가 과거와 별로 다름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나타냈다. 바로 관료제 기구가 변화와 혁신에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면에서 브레주네프 정부는 갈수록 보수적이었으며 시대의 흐름에 역행했다. 많은 반체제 작가와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체포·투옥되거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소련의 문화정책은 경화되었다.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받은 대우는 반체제 인사에 대한 소련 정부의 태도를 나타내는 좋은 예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침공 전에도 경찰은 이미 그의 미발표 원고 전부를 압수하고 출판·유포된 그의 몇 안 되는 작품도 회수했다. 1969년 11월에 솔제니친은 작가동맹에서 축출되었고, 이듬해 그에게 수여된 노벨 문학상은 그에 대한 비난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체포와 투옥의 위험이 있었지만 흐루시초프 이후에 저항운동이 일어났으며, 과학자와 창조적 인텔리겐치아를 대표하는 유명인사부터 학생과 청년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헌신적인 운동가들에 이르기까지 이 운동에 동참했다.

브레주네프 정부는 외교적인 난제들과 씨름했다. 가장 골치아픈 문제는 중국과의 관계였다. 1969년 3월에는 우수리 강 연안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하고, 8월에는 소련과 신장 성[新疆省] 접경지대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곧이어 협상이 타결되었으나 마찰은 해소되지 않았다. 인도차이나 전쟁중에 소련이 북베트남에 제공한 막대한 군사·경제 원조는 중국에 대한 북베트남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동유럽에서 갈수록 독립의 기운이 높아져 드디어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해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대응으로 소련은 1956년에 헝가리에 무력개입했던 것처럼 병력을 투입했다. 이 침략을 정당화한 논리가 후에 브레주네프 독트린으로 알려진 것으로, 소련에 인접한 동유럽 공산국에서 일어나는 사태가 소련의 이익이나 소련의 동맹국들의 안보 이익을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판단될 때는 소련은 언제나 무력개입의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었다. 이 브레주네프 독트린은 1979년 실행에 옮겨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1년 동안 쿠데타와 반란이 계속된 결과 소련의 영향력이 위협받게 되자 소련은 마침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것이다.

소련은 1965년 2월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한 이래 더욱 격렬히 '미제국주의'를 공격했으나 소련의 경제·외교 상의 입지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서방측과 어느 정도 화해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으로 긴장완화 정책을 수립했다. 동서관계 개선을 위한 중요한 조처는 1970년에 이루어진 독일문제의 해결(기존의 국경선에 대한 불가침성 인정), 1972년 미소간에 체결된 제1차 솔트(SALT:전략무기 제한협정), 그리고 1975년의 유럽 안보협력회의 결의서(헬싱키 합의서)의 서명이었다. 그러나 헬싱키 합의서의 인권보장조항은 하나의 과제로 남았고 소련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외부의 조사에 응하지 않을 것임을 역설했다. 서방과의 무역은 순조로웠고, 긴장완화로 얻은 경제적 이득과 함께 잇따른 외교정책에서도 승리했다.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정복을 끝냈고, 이듬해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혁명가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예멘(아덴)이 소련의 맹방이 되었고, 1978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유혈 쿠데타로 소련과 20년 우호조약을 체결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에서는 소련의 군사력 증강을 우려하는 소리가 높았지만, 양국은 1979년 6월에 제2차 솔트에 서명함으로써 각국의 전략 미사일 보유를 1981년까지 2,250기 이하로 제한하기로 합의했다.

 

고르바초프 :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1982년 브레주네프 사망 이후 소련은 위기상황을 맞았다. 브레주네프는 노령으로 인해 집권 말기에 효율적으로 국가를 통치하지 못했으며, 코시긴은 1980년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당의 정치국은 노년층이 지배하고 있었고 그들 중 러시아인이 압도적이었다. 당 수뇌부와 정부의 비러시아계 인사는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위기는 대체로 러시아의 위기였다. 유리 V. 안드로포프와 그 뒤를 이은 콘스탄틴 체르넨코는 1982∼85년에 집권했지만 위기 극복에는 실패했다.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서기장직을 맡았을 때 그는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정치·경제 재건 계획인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경제성장을 가속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체제 자체는 기본적으로 건실하다고 믿었다. 고르바초프 내각에는 전임자들 때보다 러시아인이 한층 더 많았다.

고르바초프는 국민총생산(GNP)의 25%를 차지하는 국방비에 대한 부담이 국가 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음을 알았다. 과다한 국방비 지출은 교육·사회복지·보건 부문의 예산을 삭감하게 만들었다. 행정기관의 부패로 인해 국민들은 공무원들이 불법적인 특권을 누리면서 일반 시민의 요구에는 응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규칙을 준수하게 만드는 힘인 정통성이 공산당에게는 부족했다. 당은 사회불안을 깊이있게 들여다보지 않았다. 러시아 내부의 민족문제에 특히 그러했다. 당은 이슬람세력의 등장에 대해서만 조금 파악하고 있었을 뿐이었다(1989년 이슬람교도는 소련 전체 인구에서 1/6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쇠퇴와 함께 이슬람 세력이 자기 목소리를 높인 것이 우려되었다). 소련의 많은 소수민족들은 경제불안으로 인해,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러시아인들의 탓으로 돌렸다.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인 공무원과 반대론자들은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소련사회의 문제점을 공공연히 러시아인에게 책임지우고 처벌을 하려는 것으로 보고 이를 반대했다. 글라스노스트 정책은 언론에게 더 폭넓게 표현의 자유를 주었고, 신문의 사설은 위축된 경기에 대한 불만과 이런 상황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정부의 무능함을 꼬집었다. 반유대주의 단체를 비롯한 반동세력들 또한 등장했는데, 특히 레닌그라드(과거 페트로그라드였으며,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런 움직임이 나타났다.

고르바초프는 권력, 즉 의사결정 능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모았다. 그러나 이런 결정을 실행할 수 있는 권력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는 헌법상으로만 독재자였을 뿐이다. 그의 정책은 실제적으로 집행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했을 때 그의 반대파인 예고르 리가초프는 소련내 2개 핵심권력 중 하나인 공산당 중앙위원회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고르바초프가 당을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도구로 이용하지 못한 이유였다. 그러나 1988년 여름까지 고르바초프는 중앙위원회를 약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매일 일어나는 경제운영에 당이 간섭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이런 책임은 지방 소비에트 정부로 넘겨졌다. 새소비에트 의회인 인민대표회의는 1989년 봄에 문을 열었고 고르바초프가 의장직을 맡았다. 이 기구는 최고소비에트를 대체하는 최고 권력기구가 되었다. 인민대표회의는 최고소비에트 임원을 새로 선출했고,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프랑스의 제도를 참조한 행정부 수반직이며 폭넓은 권한을 지닌 소련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것은 러시아가 처음으로 대통령제와 유사한 제도를 채택함으로써 다른 공화국들도 이제도를 도입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의 이상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그저 소련을 일본이나 독일,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동등한 경제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 해외 순방을 통해서 소련이 더 이상 누구에게도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레고리 A. 야블린스키가 주도한 고르바초프 진영의 급진파 경제학자단은 서구식 성공을 위해서는 시장경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미 몇몇 시장경제 제도가 도입되기는 했지만 고르바초프는 완전한 시장경제를 도입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0년 가을 고르바초프는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그는 민족문제에 시달렸으며 경제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그는 독립과 자치를 요구하는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발트 3국에 무력 사용을 허가함으로써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고르바초프가 직면한 이러한 어려움은 여러 공화국의 다른 정치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러시아 공화국 사람들은 보리스 옐친에게 돌아섰다. 옐친은 1985년 모스크바 새 당조직의 일원으로 발탁되었고 결국 모스크바 공산당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곧 부패를 척결하고 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자신의 급진적인 정책이 방해받고 있으며, 고르바초프가 자신을 지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모스크바 당 지도자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1987년 10∼11월에는 정치국원에서도 제외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그의 정치생명은 끝난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이 일은 옐친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경험이었고 이로 인해 한동안 실의에 빠져 정당조직이나 운동에 착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옐친은 모스크바 시민들을 상대로 지지를 얻는 일을 시작하여 1989년 3월 인민대표회의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인민대표회의가 상시의회인 최고소비에트를 선출할 때 옐친은 선출되지 못했다. 그것은 인민대표회의에 공산당원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탓이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대표가 그를 지지하며 사퇴해 처음으로 전국 무대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는 의회에서 고르바초프, 공산당, 부패, 경제개혁의 느린 속도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고르바초프의 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옐친은 러시아 의회 의장이 되었다. 옐친은 러시아 국민들의 지지를 직시했다. 1991년 3월 고르바초프가 소비에트 연방의 미래에 대해 전 연방에 국민투표를 발의했을 때 러시아와 몇몇 공화국들은 몇 가지 요구조건을 덧붙였다. 러시아 공화국이 제기한 문제 중 하나는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국민이 원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국민들은 그것을 원했고 그들은 옐친을 선택했다. 그는 새로 얻은 합법성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주권을 향상시키고 급진적인 경제정책을 옹호하고 채택하는 한편 고르바초프의 사임을 요구했으며 발트 3국의 독립의지를 꺾기 위해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에서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옐친은 러시아 군에게 비무장 민간인들에 대한 발포명령을 따르지 말 것을 촉구했다. 1990년 6월 러시아 공화국은 독립국임을 선포하고 러시아법이 공화국에서 가장 우선임을 공고히 했다. 이것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을 유지하고자 하는 고르바초프의 모든 노력이 무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옐친은 형식적인 소련의 주도국 역할을 하는 대신 새로운 연방을 결성해 러시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러시아 의회는 시장경제를 주요골자로 하는 급진적 경제개혁안을 통과시켰고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 내에 있는 소련의 기관들에 대한 자금지원을 중단했다. 명백히 옐친은 러시아가 소련이라는 장애물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으며 연방의 해체를 원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충분한 준비 없이 실행된 1991년 8월 19∼21일의 쿠데타는 공산당의 종말을 가져왔고 소비에트 연방 해체 움직임을 가속화했다. 공산당의 강경파 간부들이 주도한 쿠데타는 신연방조약을 반대해 이를 이전 상태로 되돌리고 보수파의 시대로 회귀하려는 시도였다. 반쿠데타 세력에서 단연 돋보이는 활동을 한 인물은 옐친이었다. 그는 영민하게도 자신과 러시아를 모두 고양시킬 기회를 잡았다. 그는 소련 대통령인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주장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크림 반도의 여름별장에서 돌아왔을 때 옐친은 이미 자신이 더 강한 지도자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옐친은 러시아의 공산당 활동을 금지하고 영토 내의 소비에트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법률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것은 대통령령보다는 법원 명령으로 행해졌어야 할 일이었다

 

소련 이후

법률상으로 소련은 1991년 12월 31일 사라졌다. 러시아와 10개의 이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들은 독립을 선언했고 1991년 12월 21일에 수도를 민스크로 하는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했다. 법적으로는 소련군이 그대로 CIS군이지만 이 새로운 느슨한 구조의 연합은 하나의 국가는 아니었다. 군에 대한 통제는 곧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그러했다. 독립 후 러시아는 소련의 강력한 핵무기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고 세계 최대의 재래식 군대를 통제하고 있었다. 모든 소련의 대사관과 영사관은 그대로 러시아가 이어 받았으며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의 영구의석을 물려받았다. 러시아는 소련을 계승하는 지배적인 공화국이 되었는데 각 공화국들은 역사적으로 드러난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야심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었다.

새 국가는 러시아 연방으로 불리게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를 어떻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이행시켜 나가는가에 대한 뚜렷한 구상없이 출범하게 되었다. 다른 여러공화국이 처음 독립하면서 겪었던 심각한 사회 무질서와 경제 혼란을 러시아도 경험했다. 러시아는 서방국가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상황이 호전될 기미가 없자 옐친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는 이어 만만치 않은 민족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러시아가 1917년 이전에 이미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으로 제국의 일원으로 자치주를 형성하고 있던 많은 민족들은 더 이상 러시아 정권 아래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러시아 정교회는 새로 태어난 러시아의 도덕적 경계선을 긋는 역할로 부흥을 꾀했으나 이슬람교를 비롯한 소수민족들의 다양한 종교들은 수십 년간의 소련의 압력에서 벗어나 강해지고 있었다. 또한 중앙정부로 몰려들었던 권력은 연방의 붕괴 이후 주변부로 급속히 빠져나갔다. 199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명백해진 것은 많은 소수민족들이 시대가 부여한 새로운 정치적 자유를 이용하려고 애쓰면서 러시아가 그들을 통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타타르스탄과 체체니아와의 조정이 어려웠다. 모스크바는 상당한 정치적·경제적 자치를 타타르스탄에 제공하는 조약을 허용했다. 체체니아는 1991년 11월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1994년 가을에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1991년 8월 쿠데타 시도가 있은 후 옐친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확인하는 내용의 신헌법을 신속히 입안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옛 소련의 최고소비에트 직분을 버렸고, 그가 1993년 9월 인민대표회의를 해산할 때까지 권력을 둘러싼 정쟁이 심화되었다. 의회해산은 10월 3∼4일에 무력충돌을 불러 일으켜 의사당에 군대가 들어가 이를 진압했다. 새 선거가 12월 12일 있었으며 신헌법이 같은 날 승인되었다. 프랑스 헌법을 본떠 옐친이 기안한 신헌법은 대통령에게 큰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입법부가 구성되었지만 러시아 국민들의 불만은 선거 결과에 혼합되어 나타났다. 정력적이며 괴짜인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가 이끄는 자유민주당과 공산당, 그리고 농민당(지방 공산당)이 의회의 다수파로서 자리잡은 것이다. 이들은 연합정당인 '러시아의 선택'의 제1총리 예고르 가이다르가 주도하는 시장경제로의 신속한 이행을 거부했다. 러시아의 보수적인 민족주의는 새 정부에도 영향을 미쳤고, 옐친은 두마(하원)의 동의를 얻으려 했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90년 중반까지 러시아는 CIS의 경제·군사에 있어서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옛 공화국들을 '가까운 외국'으로 지칭했다. 러시아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상당한 마찰을 빚었으며, 이어 벨로루시가 러시아의 경제권으로 더욱 가까이 편입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러시아는 서방자금의 지급보증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랐고 1990년대 중반까지 러시아 기업의 약 3/4이 민영화되었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러시아와 소련의 역대통치자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