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들과 장사꾼들의 무대
김성일
세상에 돈이 생기면서부터 부의 ‘무한축적’은 가능해졌다. 이로써 인류의 탐욕에는 한계가 없어져 버렸고 그때부터
너도 나도 눈에 불을 켜고 돈을 긁어 모아 쌓아 두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돈’의 문제를 경고한 것이다.
통곡하는 사람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심판’의 마지막 장면은 죄악의 도성
바벨론이 마침내 멸망하고 하늘에서 거룩한 성인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은 바벨론이 붕괴될 때 그 성과 더불어
번영하던 두 무리의 사람들을 고발하고 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王)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商賈)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계 18:2~3).
바벨론이 무너질 때 이 ‘왕들’과
‘장사꾼들’은 그 성을 바라보며 통곡한다. 그들의 시대가 이제 끝났으며 그들에 대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王)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땅의 상고(商賈)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사람이 없음이라”(계 18:9~11).
바벨론이 멸망할 때 함께 통곡하는 이 ‘왕들’과 ‘장사꾼들’의 모습은 이제 우리를 실감나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돈을 버는 일은 별개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훌륭한 인격과 경륜을 가진
지도자들의 일이며 돈을 버는 것은 지혜롭고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맡겨진 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정치학과 경제학은 별도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정보화 시대로 들어서면서 정치와 경제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온갖 고리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왕들과
장사꾼들 사이에 얽혀져 있던 긴밀한 유착관계가 백성들을 놀라게 했고 사법부에 잡혀가고 또 풀려나오는 사람들의 이면에 권력과 돈의 문제가 어떻게
걸려 있는 것인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라 안의 문제에도, 국제적 분쟁과 외교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나라이든 정권이
바뀌면 지금까지 건재했던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이 탈세, 부정, 수뢰 등 돈과 관련된 스캔들에 얽혀 추락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순진한 백성들은 정의와 애국의 구호 뒤에 권력과 돈의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런 사건들이 수사와 체포로 이어지기도
하고 막후의 협상으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권력과 돈의 관계는 밀접하다.
국제적 분쟁이나 외교의 문제에도 역시 왕들과 장사꾼들의
이해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된다. 전에는 백성들이 가족과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 피를 흘리며 싸웠으나 이제 전쟁이라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세력확장과 무기상들의 판촉을 위한 대형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알게 되었다. 구식무기의 재고증가와 신형무기의 개발 그리고 무역분쟁은
전쟁발발의 신호탄이다.
왕들은 백성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며 평화를 약속한다. 그러나 평화의 약속은 권력자들의 위선이다. 평화가
계속되면 왕의 자리는 위협을 당한다. 권력자가 가장 안전한 것은 전쟁을 할 때이다. 전쟁이 나면 왕은 백성을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으며 아무도
왕이 결정하는 일에 시비를 걸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능한 지도자들은 곳곳에 분쟁의 씨앗을 심어 놓고 차례로
이용한다.
한반도의 분단도 바로 그런 사례 중의 하나였다.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루즈벨트와 처칠은 대일전쟁에 아무런 공헌도 없는
소련에 한반도의 절반을 맡겨버렸고 소련은 종전 직전에 참전하여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미국과 영국이 왜 한반도의 절반을
소련에 주어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후로 한반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로
이스라엘과 아랍 세력이 다투는 중동지역과 두 강대국이 대치했던 베트남과 두 사상이 대립했던 한반도의 긴장은 정치적 세력 균형과 무기상들의
돈벌이에 큰 기여를 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군의 철수로 끝났으나 중동과 한반도는 아직도 협상과 분쟁의 소지를 함께 지닌 위험지대로 남아 있다.
다만 미국의 견제 상대가 소련이 아닌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미국이 인권을 내세워 중국 내의 티벳
독립운동과 파룬궁(法輪功)을 응원하는 태도도 이해하기 어렵다. 티벳은 철저한 환생사상의 본거지이며 파룬궁은 과거 중국을 뒤흔든 백련교나
의화단처럼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정치적 역학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나라에서 터놓고 그런
세력을 옹호할 수 있는 것일까?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신앙의 자유’라는 것도 사실은 그 유래가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만들어낸 가나안 사람들이 새로운 신들을 보급하기 위해
내세운 논리가 바로 신앙의 자유였다. 그 사상을 헬라와 로마에서 계승했고 지금과 같이 온 세상을 만신전(萬神殿)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헬라로 들어간 가나안 문화를 다시 받아들인 로마도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세계의 모든 신들을 자유롭게 섬기도록 했다. 그래서
로마는 신들의 경연장이 되었고 지금도 여러 나라의 신상과 신전들이 뒤섞여서 남아 있다. 그 로마가 유독 기독교만을 박해했던 이유는 어이없게도
그것이 무신론(無神論)이라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신상도 없고 신전도 없다고 무신론으로 취급당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심판의 날에
통곡하게 될 ‘왕들’과 ‘장사꾼들’의 두 세력이 오늘날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 지금도 그들을 조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반역한 가나안 문화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사단의 세력으로 간주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그들 중 ‘왕들’은 ‘바알’이라는 신을 만들어 내었고
‘장사꾼들’은 ‘아스다롯’이라는 여신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는 그 신들이 이 시대에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것들의 유래를 좀
더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일까?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편한
분’으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벨론이 멸망할 때 함께 통곡하는 ‘왕들’과 ‘장사꾼들’의 모습은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돈을 버는 일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과연 우리의 경제원리는 정의가 살아 있을까?
전장과 시장
‘왕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은 필요할 때마다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백성을 다스릴 지도자를 택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게 되자 자신의 힘과 지략으로 인간을 지배하려는 ‘영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의와 애국을 주장하기도
하고 전쟁의 명분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 내심의 목적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을 지배하려는 것이었다.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왕들’의 내심이 이러했으므로 우선 그 생각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고 진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대신하려다보니 불가피하게 자주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불편하다고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왕들은 백성을 보호해준다는 명분으로 백성에게 여러가지 의무를 요구했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兵車)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삼상 8:11~12).
왕은 혼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아들들을 징병과 징용에 끌어내어 자기를 위해 싸우게 했다. 뿐만 아니라 딸들도
동원되었다.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로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삼상
8:13).
여자들도 군수산업과 왕궁의 일과 주방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에게 위안과 쾌락을 제공하기 위해서 끌려가기도 했다.
또 왕의 큰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징세와 징발의 의무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일을 취하리니……”(삼상 8:14~17).
이렇게 왕의
제도를 설명하는 하나님은 그 결과를 분명히 밝혀주었다.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왕들’이 백성들을 보호해
준다는 대가로 이렇게 가혹한 징병과 징용 그리고 징세와 징발을 강요하려면 보다 두려운 명분을 내세워서 백성들을 위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왕들은 하나님을 내세웠다. 자신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백성들을 보호하고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의 자리는 영원하지 못했다. 보다
강한 영웅이 나타나서 먼저 왕의 자리를 빼앗는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중의 왕에게는 ‘정통성’의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이
먼젓번 왕을 세우셨는데 새로운 왕은 그를 축출하고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왕은 새로운 신을 필요로 하게 된다. 즉 그는
‘다른 신’에게서 신탁을 받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신탁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영웅들에게 ‘한분이신 하나님’은 불편한 존재가 되고
새로운 신이 필요하게 된다.
‘왕들’에게 하나님이 불편한 이유는 또 있다. 그들이 자신의 탐욕과 야심을 감추고 그럴듯한 주장과
명분을 내세워 지도자가 되려 하더라도 빛이 있으면 어둠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으면 그들의 야욕과 거짓말은 그 빛에
노출되어 곧 드러나게 된다. 이런 것만으로도 세상을 지배하는 ‘왕들’이 하나님을 불편하게 여기고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낼 이유는 충분하다.
최초의 배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되었다. 가나안 사람들이 만들어낸 최초의 우상은 ‘엘’ 신이었는데
‘엘’이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다메섹 박물관에는 황금으로 입힌 엘 신상이 남아 있다. 펴고 있는 오른 손과 주먹을 쥔 왼손은
복과 화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데 이는 왕들이 하나님을 자기 수호신으로 과시하려고 만든 것이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銀)으로 신상이나 금(金)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출 20:23).
‘왕들’의 반역은 거기서 더
계속되었다. 그들은 또 다른 신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어머니 여신 ‘아세라’를 만들어 ‘엘’과 결혼시키고 그 사이에서 ‘바알’이 태어나게 했다.
그리고 그 바알은 나중에 엘 신을 축출하고 자신의 모친인 아세라와 결혼하여 가나안의 주신이 된다. 이렇게 해서 다시 많은 신들이 태어나게 되었고
왕들은 다른 신들을 내세워 마음대로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장사꾼들’이 사랑의 여신 ‘아스다롯’을 만들어낸 이유도 역시
하나님을 불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혜와 근면으로 장사를 하여 부(富)를 축적하기 시작한 장사꾼들은 축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식량이나 옷감을 쌓아놓으려면 거대한 창고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쌓아둘 수 있는 기간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재화를 상하지 않게 오래
축적할 수 있는 ‘돈’을 만들어냈다.
인류 최초로 화폐를 만들어 사용한 것은 역시 천부적 장사꾼들인 페니키아 즉 가나안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돈이 생기면서부터 부의 ‘무한축적’은 가능해졌다. 이로써 인류의 탐욕에는 한계가 없어져 버렸고 그 때부터 너도 나도 눈에
불을 켜고 돈을 긁어 모아 쌓아 두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돈’의 문제를 경고한
것이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마 6:19).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그러나 ‘돈’에 중독된 가나안의 장사꾼들은 더 많은 상품을 팔기 위해 뛰었다. 그러나 이들의 ‘무한판촉’을 가로막는
불편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허영과 사치를 금하시는 하나님이었다. 더구나 그분이 제정해 놓은 ‘일부일처제’는 장사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자유연애의 여신 ‘아스다롯’을 만들어 온 세상을 타락하게 하고 장사의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렇게 해서 아스다롯은 온 세상의 시장을 장악했고 21세기의 시장을 ‘무한경쟁’의 시대로 몰아넣었다.
‘왕들’은 바알을 만들어 인류를 종으로 만들고 ‘장사꾼’들은 아스다롯을 만들어 가난한 자의 품삯을 빼앗아가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마침내 고달픈 전장과 시장에서 방황하게 된 것이다.